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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계좌추적이 검찰수사 핵심이다

입력 | 2002-10-08 18:49:00


한광옥 전 대통령비서실장(현 민주당 최고위원)의 고소로 ‘4000억원 대출의혹사건’ 수사에 나선 검찰의 태도가 석연치 않다. 미리부터 ‘명예훼손 수사’로 선을 긋고 있는 듯해서다. “한 전 실장이 전화로 대출을 지시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 엄낙용 전 산업은행 총재의 국회 증언이 명예훼손인지 아닌지를 가리려면 대출 경위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가 선행돼야 한다는 점에서 검찰의 선긋기는 수사 상식에 반한다.

그런 식이라면 검찰은 나중에 중대한 자기모순에 부닥칠 가능성이 있다. 만약 대출압력이 드러난다 하더라도 명예훼손과는 무관하다는 이유로 압력을 가한 사람에 대한 처벌은 유보한 채 엄 전 총재만 무혐의처리하고 수사를 종결할 것인가. 반대로 대출압력을 밝혀내지 못하면 의문투성이인 대출경위나 사용처는 묻어둔 채 엄 전 총재만 명예훼손으로 처벌할 것인가. 어느 쪽도 합당치 않다는 것을 검찰 스스로 잘 알 것이다.

검사 한명이 한달에 수백건씩의 일반 형사사건을 처리해야 하는 서울지검 형사부에 이 사건이 배당된 것도 수긍하기 어렵다. 단순한 의혹제기 수준을 넘어서는 구체적인 증언과 정황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진상규명을 위한 손쉽고 간단한 절차마저 회피하고 있어 국정조사까지 거론되고 있는 이 사건을 ‘일개 고소사건’으로 취급한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 사건의 출발점은 대북(對北) 뒷거래 의혹이고, 핵심은 권력 실세의 압력 여부와 비정상적인 거액대출 그리고 아직도 베일에 싸인 쓰임새의 연관성이다. 그 중 압력 여부만 가리는 것은 ‘꼬리 자르기’나 ‘입막음’ 수사가 아니냐는 새로운 의혹만 키우게 될 것이다. 물론 수사는 진행상황에 따라 가변적일 수 있겠지만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검찰의 진상규명 의지다.

본란에서도 거듭 강조했듯이 이 사건의 전모를 신속히 파헤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제 법적 장애도 없어졌으니 검찰은 당장 계좌추적을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