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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눈]이리에 아키라/北-日 문화교류 물꼬 터야

입력 | 2002-10-09 18:47:00


지난달 17일 평양에서 열린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와 김정일(金正日) 북한 국방위원장의 회담 성과에 대해서 논란이 많다. 우선 김 위원장이 납치사건을 사죄한 점을 평가하는 시각과 진상을 더 추궁해야 한다는 의견이 엇갈린다. 또 식민지 지배 등에 대한 고이즈미 총리의 ‘사과’로 한반도에서 ‘과거 청산’이 이뤄졌다며 환영하는 목소리나, 북한의 미사일 발사 동결이나 북-일간의 안전보장문제를 협의하기로 약속함에 따라 동아시아에도 냉전이 종결될 것이라는 기대 등 다양한 반응이 있었다.

▼北의 글로벌화 바람직한 일▼

지금 단계에서는 이 회담이 과연 역사의 큰 전환점이 될 것인가는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대국적인 시야에서 이번 일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을 말해 보고 싶다.

이 칼럼에서 자주 강조해 왔듯 글로벌화라는 흐름은 현대세계를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글로벌화는 요컨대 세계 각 지역간 경제 정치 문화적 연결관계가 깊어지는 것이다. 이런 움직임이 전 인류에 바람직한지는 아직 컨센서스가 이뤄졌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글로벌화와 그 정반대 즉, 폐쇄적으로 지구를 세분화하는 것 중에서 선택하라면 전자를 택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다. 국제사회 안정과 평화를 위해서는 세계 전체가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상호의존체제가 배타적인 블록주의나 쇄국정책보다는 훨씬 바람직할 것이다. 이를 전제로 북-일 관계를 들여다보자.

첫째, 고이즈미 총리와 김 위원장이 서명한 평양선언에서 양국이 ‘정치 경제 문화적 관계를 수립한다’는 것이 명시됐다. 이는 그동안 배타적, 쇄국적인 자세를 보여온 북한이 글로벌화로 나아간다는 것을 확인해 줬다는 점에서 환영할 만하다. 북한은 일본이나 미국과 정상적인 관계를 갖지 못했던 만큼 이번 고이즈미 방북이 북-미, 북-일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까지 발전하게 된다면 북한의 글로벌화를 더욱 확실하게 할 것이다. 이는 국제사회 전체에도 바람직하다.

둘째, 평양선언에서는 북-일간의 ‘불행한 과거를 청산’하기로 했다. 글로벌화란 국제사회의 미래를 지향하는 것이지만 과거에는 그 흐름에 역행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제국주의나 식민주의가 그 예다. 강대국에 의한 식민 지배는 세계를 분할하는 것으로 그만큼 글로벌화의 진전을 방해했다. 그 과정에서 식민지 국민에게 직간접적으로 큰 고통을 안겨주었는데 일본의 제국주의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본 정부의 사죄는 앞으로도 글로벌화에 적극 협력하겠다고 공약하기 위해서도 필요했다.

셋째, 북-일 정상회담에 대한 일본 내 반응을 보면 글로벌한 태도라고 하긴 어렵다. 납치사건에서는 더 그렇다. 납치사건은 분명히 불행한 사건이다. 김정일 정권이 지금껏 전면 부정해 온 납치 의혹을 스스로 번복했다는 점에서 환영받을 일이지만, 오히려 전체주의 정치제도의 어두운 면에 주목한 사람도 많다. 일반 시민을 납치해 스파이교육을 시킨 것은 글로벌화의 정신과는 정반대다. 앞으로 북한이 개방되면 이런 사건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일본으로서도 당연히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일부 매스컴이나 정치가 평론가 등의 발언을 보면 일본 중심주의적이며 국수주의적인 감정론을 내세우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인권보호의 보편적인 원칙에 위배되는 납치문제를 일본의 내셔널리즘을 고양하는 기회로 이용하는 것은 북한의 글로벌화를 추진하려는 자세와는 분명히 모순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평양선언이 문화교류를 거론한 것에 주목하고 싶다. 우연히 지난달 21일 나는 미일 풀브라이트 교환 유학생 제도 50주년 기념 행사에 참가할 기회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7년 만에 일본과 미국은 평화조약을 맺을 수 있었다. 비참한 전쟁을 체험한 다음 평화로운 관계를 구축하는 첫걸음으로서 일본에서 수십 명의 학자나 학생이 풀브라이트 제도 아래 미국에 초대받았다. 그 후 50년, 이 제도로 7000명의 일본인이 태평양을 건너고 2000명의 미국인이 일본에 왔다. 미일관계를 수복하는 데 그들 9000명이 수행한 역할은 대단히 귀중한 것이다.

▼日 감정적 대응 도움 안돼▼

같은 문화교류가 북한과 일본 사이에도 이뤄지길 기대한다. 한일간에는 미일간과 마찬가지로 50년에 걸친 교류 실적이 있다. 그것이 반드시 곧바로 한일간 우호관계를 맺어준다고는 할 수 없더라도 교육이나 문화면에서 연결고리가 없었다면 양국 관계가 마찰로 치달았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국경을 넘는 경제 정치 문화적 연결이라는 의미에서의 글로벌화의 추진은 현대세계의 중요한 명제다. 고이즈미 방북이 북한뿐 아니라 일본과 그 밖의 국가들이 한층 더 글로벌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이리에 아키라 하버드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