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운재
한국축구대표팀의 수문장 이운재(29·수원 삼성)가 고개를 숙였다.
이운재가 누구던가. 2002한일월드컵에서 독일의 올리버 칸과 함께 최고의 골키퍼에게 주어지는 ‘야신상’을 다툰 세계정상의 수문장이 아니던가. 그런 그에게 10일 이란전은 차라리 ‘악몽’이었다.
이날 준결승에서 한국이 우세한 공격을 펼치고도 연장전까지 골을 터뜨리지 못했지만 축구팬들은 내심 믿는 구석이 있었다. 최근 국제대회에서 ‘승부차기 불패 신화’를 엮어냈던 이운재가 한국 골문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첫 번째 키커인 네코우남부터 노스라티, 카베이, 모발리, 골모함마디까지 이란의 키커들은 정확하게 한국 왼쪽 골문을 갈랐고 이때마다 이운재는 반대편으로 몸을 날렸다.
여기에 한국의 두 번째 키커인 이영표가 찬 볼은 크로스바를 맞고 튕겨나왔다.
4개월 전 2002한일월드컵에서 4강 신화를 이루며 세계를 놀라게 했던 한국축구가 아시아 정상에도 오르지 못하고 좌절한 것만큼이나 이운재의 패배도 충격적이다.
월드컵에서 이운재의 활약은 가히 명불허전이었다. 독일과의 4강전까지 6경기에서 단 3골만을 허용하며 한국축구가 세계 4강에 오르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해냈다. 특히 스페인과의 8강전에서는 승부차기에서 스페인의 네 번째 키커인 호아킨의 슛을 절묘한 다이빙으로 막아내 영웅으로 떠올랐다.
월드컵이 끝난 뒤에도 그의 불패 신화는 이어졌다. 7월20일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열린 제8회 아시안슈퍼컵 결승전 승부차기에서 거미손 방어로 수원 삼성에 우승컵을 안겼던 주인공도 바로 그다.
상무에 입대하기 전 1999년까지 4년 동안 수원에서 활약하면서 이운재는 프로축구 103경기에서 109골을 허용했다.
그러나 페널티킥은 단 한골도 내주지 않았다. 승부차기에서는 프로 통산 8승1패. 승부차기에 관한 한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었기에 이날 이란전 패배는 더욱 뼈아프다.
2002월드컵 독일과의 4강전에서 0-1로 패한 뒤 “야신상 후보에 올랐는데 기분이 어떠냐”는 질문에 “팀이 졌는데 나만 상을 받으면 뭐하냐”며 입술을 깨물었던 이운재. 그는 다시 고개를 숙인 채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부산〓양종구기자 yjong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