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팅 게임/체리 루이스 지음 조숙경 옮김/287쪽 1만2000원 바다출판사
˝방사성 물질은 태초에 태엽이 감겨진 시계다.” (아서 홈스)
하잘 것 없는 잡목일지라도, 베어지는 순간 그 일생의 내력을 털어놓는다. ‘나무만 아는 동그란 나이’에 한 생명체가 경험한 햇살과 장마, 엄동설한의 기억이 들어있는 까닭이다.
폐허가 된 도시도 그 내력을 어딘가엔 감추고 있어서, 농부의 곡괭이질 끝에 ‘위대한 왕 누구누구가 재위 모년에 이 궁을 세우노라…’ 라고 쓰인 벽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렇다면 46억4000만±4500만년이란 연대기를 갖고 있는 지구의 역사는? 바다 깊숙이 쓰여있는 것도, 외계인이 알려준 것도 아닐진대 어떻게 1% 미만의 오차범위로 그 장구한 내력을 추정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지구의 나이’ 찾기에 바쳐진 과학자의 일생을 통해 ‘가설’이 ‘진리’로 대치돼온 과학적 진보의 현장을, 진리를 추구하는 한 인간의 끊임없는 열정을 밀도높게 그려낸다.
지질학자 아서 홈스(Arthur Holmes·1890∼1965). 오늘날 그는 ‘대륙의 분리는 지구 심층부의 대류(對流) 때문이다’라는 ‘맨틀대류설’의 창시자 정도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그가 평생을 바친 문제는 ‘지구의 나이’ 였다. ‘46억년’을 확정지은 영광은 후배인 클레어 패터슨에게 돌아갔지만, 패터슨에게 진리라는 보물을 안겨준 ‘보물지도’ 대부분을 그는 외로이 한 획 한 획 그려나갔다.
그 반세기동안 홈스는 이중의 투쟁을 펼쳐야 했다. 너무도 자주 예상과 모순되는 실험결과는 그를 때로 지치게 했다. 기존의 학설을 고수하며 그를 지적 이단아 취급하는 기존의 학계는 그에게 더욱 큰 장벽이었다.
지구 나이를 찾는데 어떤 시계를 사용할까. 우리는 쉽게 ‘탄소 연대측정법’을 떠올린다. 그러나 탄소측정은 5만년 이하의 사물에만 사용되는 만큼 지구의 일생에 비하면 ‘스톱워치’에 불과하다. 19세기 말까지는 지열(地熱), 바다의 염분, 바다의 퇴적층 등을 통해 지구의 나이를 2000만∼2억년으로 계산했다. 특히 켈빈의 ‘2000만년 설’은 과학계의 대세를 이루는 이론이었다. 그러나 홈스는 지구가 먼지구름 속에서 생성된 이래 줄곧 재깍거려온 ‘정밀시계’에 주목했다. 그 정밀시계란 암석층에 들어있는 ‘우라늄과 납’이었다.
영국 왕립과학칼리지에서 국가장학생으로 공부하던 시절의 아서 홈즈.-사진제공 바다출판사-
원리는 어렵지 않다. 방사성 원소는 일정한 시간마다 일정한 비율로 붕괴한다. 만약 우라늄의 반감기(半減期)가 하루라면, 바위 속에 든 1만개의 우라늄 원자는 다음날 5000개, 그다음날 2500개만 남고 나머지는 라듐으로 변한다. 그러므로 우라늄과 라듐의 비율을 계산하면 지구의 나이를 알 수 있다 (사실에 있어서 우라늄의 반감기는 우연히도 지구의 나이와 비슷한 45억년이며, 8단계의 붕괴를 거쳐 최종적으로 납이 된다). 마치 ‘당신에게 1억원이 있다. 복리로 연 1%의 이자가 붙고 원금은 1만원이다. 당신은 언제 돈을 넣었는가’를 계산하는 것과 비슷하다.
‘외곬수 과학자의 골방 속에서의 투쟁’을 떠올린다면 이 책은 우라늄이나 납처럼 딱딱하게 느껴질 것이다. 책을 읽어나가는 순간 그런 기우(杞憂)는 다섯 페이지마다 반감(半減)해 곧 사라져버린다. 제목 ‘Dating Game’을 보고 ‘젊은 남녀들의 사랑놀이’를 연상하는 독자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지질탐사를 위해 홈스가 찾은 열대의 모잠비크. 그곳에서 남몰래 사모하던 에디에게 편지를 보내지만 언제 답장이 도착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처녀는 어떤 회신을 보냈을까. 한 과학자의 인생과 내면을 그려낸 짧은 전기로서도 이 책은 사뭇 흥미진진하다. 홈스에 대한 저자의 공감이 그만큼 컸던 때문일 것이다.
생계를 위해 미얀마의 석유시추팀에 합류했다가 직장도, 돈도, 잠깐이나마 학문도, 게다가 말라리아로 아들까지 잃는 그의 처연한 심사를 짚어나가는 장면에서는 독자의 콧등까지 시큰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책의 진면목은 단연 진리를 향한 도전가와 기존 이론의 수호자들이 빚어내는 흥미로운 지적 전투에 있다. 최초에 반대자들은 그가 계산한 시간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터무니없이 길다’며 일축한다. ‘방사능의 반감기가 일정하다는 점을 입증할 수 있는가?’라는 등의 상식 밖의 반격도 그는 받아넘겨야 했다.
과학이란 전 분야가 함께 발전해나가는 과정이라는 점도 이 책은 깨우쳐준다. ‘동위원소’의 개념이 확립된 뒤에야 홈스는 정확한 데이터를 가지고 성과를 올릴 수 있었으며, 이 시점까지 데이터의 불일치는 내내 그의 발목을 붙잡았던 것이다.
1962년. 국제 지질학회는 72세의 홈스에게 ‘지질학의 노벨상’인 베틀레젠상을 수여했다. 늙고 쇠약하진 홈스가 짧은 감사 연설을 했다.
“나는 늙었지만 위안이 있습니다. 지구가 나보다 훨씬 빨리 늙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열 살 때 지구의 나이는 6000살이었는데, 이제 지구의 나이는 40억살을 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더 큰 위안은, 한 사람이 일생 동안 해온 일이 결국 무시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