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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계 대학원생 81% “연구비 회계비리 경험”

입력 | 2002-10-13 17:28:00


“사장님, 어떻게 안되겠습니까? 요번에 저희가 중요한 장비를 사느라 돈을 좀 많이 썼거든요.”

“글세 도와주고 싶은 데, 요새 하도 위험 부담이 커서 말이지.”

“에이, 사장님. 거래해 온 게 몇 년째인데….이 정도 편의는 봐주셔야 지요.”

박사과정 A군은 자신의 프로젝트 연구비가 바닥나자 다른 사람이 하는 프로젝트에서 돈을 쓰기로 하고 아는 업체에 가짜 영수증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연구비를 쓴 것처럼 영수증을 제출해 돈을 타내고 업체에게는 얼마의 커미션을 주는 것이 요즘 대학원 연구실에서 널리 쓰이는 방법이다.

다음은 인건비 전용의 사례이다.

“프로젝트 계획서는 대학원생 3명의 인건비가 각각 100만원, 50만원, 50만원으로 잡혀있습니다. 하지만 연구실에서는 200만원을 공용 계좌에 입금한 뒤 이 중에서 120만원은 남겨놔 연구실에서 쓰고 나머지 80만원을 박사과정 학생에게 40만원, 석사 학생 2명에게 각각 20만원씩 인건비로 나눠줍니다.”

올해 초 젊은 과학기술자들이 조직한 단체인 한국과학기술인연합(www.scieng.net)이 지난달 이공계 대학원생과 최근 졸업생 418명을 대상으로 인터넷과 이메일을 통해 설문조사해 나온 보고서의 일부분이다.

이 설문조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연구비의 회계 비리이다. 대학원생들의 48%는 국내 대학과 교수들이 정부와 기업의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받은 연구비 중 대학원생에게 주기로 책정한 인건비를 다른 데 쓰고 있다고 응답했다.

또 12%는 연구책임자가 개인적인 용도로 연구비를 전용하고 11%는 물품을 사지 않았는데도 마치 구입한 것처럼 ‘가짜 영수증’을 만들거나 카드로 허위 결제를 하는 이른바 ‘카드깡(허위매출전표)’ 수법으로 관련업체와 연구비를 나눠 갖고 있다고 응답했다. 회계 비리 경험이 없다는 응답자는 19%에 불과했다.

이번 설문조사에서 생활에 충분한 인건비를 받고 있다는 대학원생은 9%에 불과해 인건비 전용 등에 따른 국내 대학원생들의 생활고가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연구업적 비리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39%는 연구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의 이름이 논문 저자로 들어가거나 실제 참여한 사람의 이름이 누락됐다고 밝혔고, 14%는 연구 결과를 허위 또는 과장해 보고했다고 밝혔다.

국내 이공계 대학원의 경쟁력 향상 방안으로 응답자의 46%는 괄시 당하는 국내 학위 소지자를 공무원과 정부출연연구소 연구원 채용시 우대하고, 15%가 현재 60개월인 전문연구요원 복무기간을 단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대학원생이 잡일에서 벗어나 연구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행정원을 채용하고(13%) 대학원생들에 대한 생활비 지급을 확대하며(12%) 대학원 비리를 척결해야 한다(10%)고 응답했다.

과학기술인연합 관계자는 “이번 조사에서 48%의 대학원생들은 자신의 지도교수가 비리와 무관한 선량한 교수라고 응답해 그래도 희망은 있다”며 “이번 조사가 대학원의 개혁의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신동호 동아사이언스기자 dong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