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정부의 임기말 국정표류 현상이 심각하다. 정기국회가 열리고 있지만 대통령 선거를 의식한 정치공방에만 매달려 제대로 된 입법활동과 예산심사를 기대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86일간 지속된 국무총리 부재에다 정기국회 회기마저 32일이나 단축돼 이 같은 우려를 더해 주고 있다. 정치권은 또 정치개혁과 공명선거의 기초가 될 선거법 손질도 외면하고 있다. 임기말 정기국회의 최대 현안인 민생법안 처리와 선거법 개정, 예산안 심사의 표류실태를 3회에 걸쳐 점검한다.》
올해 정기국회도 폐회일(11월 8일)을 앞두고 각종 법안이 무더기로 본회의에 상정된 다음 국회의장의 ‘방망이’ 소리에 따라 일사천리로 ‘찍혀 나오는’ 장면들이 재연될 것 같다. 정부가 올해 입법키로 계획한 각종 개혁 및 민생관련 법률안은 모두 138건. 이중 8일 현재 국회를 통과한 법안은 6건에 불과하다. 나머지 132건은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이거나 정부 심사과정도 거치지 못한 실정이다.
▽손놓은 행정부〓‘정부는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매년 3월 31일까지 당해 연도에 제출할 법률안에 관한 계획을 국회에 통지하여야 한다.’
2000년 2월에 신설된 국회법 제5조 3항이다. 정기국회에 몰아서 법안을 제출하고 졸속과 부실 심의를 막기 위해 마련한 조항이다. 하지만 올해도 이 조항은 ‘구두선(口頭禪)’에 그치고 말았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법안 49건 중 국회법을 지킨 법률안은 국군간호사관학교설치법 등 3건에 불과하다. 10월 들어서야 국무회의 의결을 마친 법률안이 13건이고 겨우 법제처 심사를 마친 법안이 6건, 아직 법제처 심사를 마치지 못한 법안이 34건이나 된다. 법제처에 접수조차 되지 않은 법안도 30건이나 된다. 각 부처가 입법안을 마련한 이후의 절차만 해도 법제처 심사→차관회의→국무회의→국회 제출→상임위 상정→상임위 법안심사소위→법사위→국회 본회의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올해도 ‘몰아치기 심사’로 인한 졸속법안 양산이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다.
이에 대해 최구식(崔球植) 국회의장공보수석비서관은 “국회의원들이 제대로 심사하거나 수정하지 못하도록 행정부가 국회가 바쁠 때 몰아서 법안을 제출한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며 “의장이 지난달 18일 대통령 앞으로 공개서한까지 보냈지만 상황은 별로 나아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박 의장은 당시 공개서한에서 “16대 대선에 따른 회기 단축을 고려한다면 정기국회가 채 두 달이 남지 않았는데도 정부 법률안 제출률은 계획의 55%밖에 안 된다”며 “국회가 심도 있게 법안심사를 하기 위해서는 조속한 법안 제출이 긴요하다”고 강조했다.
국무총리실도 지난달 정기국회가 열리기 전 대책회의를 갖고 “임시국회에서의 법률안 추진 부진으로 9월 정기국회 이후에 법안이 집중돼 국회의 법안심의 부담이 가중될 것으로 예상된다”며 조속한 처리를 각 부처에 독려했으나 서두르는 기색이 없다. 총리실의 한 관계자는 “정부의 법률안 제출 속도는 시속 100㎞ 이상씩 달리는 편도 4차로 고속도로에서 시속 50㎞ 미만으로 달리고 있는 것과 같다”고 시인했다.
▽정치권도 마찬가지〓13일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법안은 무려 601건이나 된다. 16대 국회가 개원(2000년 5월)한 이래 오랫동안 잠만 자온 법안들이다.
각 당이 올해 정기국회에서 시급히 처리해야 한다고 꼽은 법안만 해도 ‘증권관련 집단소송법안’ 등 29건이지만 어느 상임위원회도 법안 처리를 위한 전체회의는커녕 법률심사 소위원회조차 제대로 열지 않고 있다.
올해는 단축국회라 어느 해보다 효율적인 국회 운영이 필요한 때이지만 정기국회가 개회한 지 한 달이 넘도록 국회를 통과한 법안은 단 1건도 없다. 최근 두 달 사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법안이라곤 ‘자연재해대책법 개정안’(8월28일)이 유일하다. 그것도 전국적으로 극심했던 수해 때문에 민심이 흉흉해지자 정치권이 등을 떼밀리다시피 해 처리한 것이다.
국회가 이처럼 ‘본업’을 내팽개치고 있는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12월 대선 때문이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정책 인력은 모두 선거대책위원회 산하조직으로 편입된 상황이어서 최소한 올해 말까지는 법안 문제가 찬밥 신세를 면할 수 없을 전망이다. 상대당이 제기하는 각종 폭로전에 대응하고 대선공약을 개발하는 데에도 시간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양당의 정책위의장이 매일 아침 열리는 당직자회의에서 하는 보고도 온통 상대당에 대한 비방일색이다.
공적자금이나 4억달러 대북지원설에 대한 국정조사 실시 여부, 장관 해임건의안 처리 문제 등 대선정국 주도권을 잡기 위한 일이라면 하루에도 여러 차례 전화접촉을 하곤 하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원내총무도 특정 법안에 대한 이견 조정이나 법안 통과일정 때문에 머리를 맞댄 경우는 최근 몇 달 사이에 단 한 번도 없다.
▽표류하는 민생법안들〓노후 불량주택 정비를 위한 ‘도심 및 주거환경정비법’은 재건축 붐으로 부동산가격이 급등하는 등 사회문제화하면서 관심이 높아지고 있으나 당초 올해 3월 국회에 제출될 예정이던 법률안이 7개월이 지난 지난달 17일에야 국회로 넘어갔다. 암의 조기검진사업과 저소득층의 검진비용 지원, 그리고 암 연구사업 발전 위한 ‘암 관리법’은 6월중 국회에 제출한다는 게 정부의 계획이었으나 이달 초에야 겨우 국무회의 심의를 통과했다.
또 백두대간 보전방안을 비롯해 산림정책의 근간을 재정립하는 산지관리법은 올 4월 국회에 제출됐으나 아직 관련 상임위의 법안심사소위원회조차 구성되지 않고 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정부제출법안 외에도 상당수의 의원입법 법률안을 시급히 처리해야 할 법안으로 분류해 놓고 있다. 학교폭력을 예방하기 위한 ‘학교폭력중재위원회 설치 및 교육치료에 관한 특별법’, 옥탑방 등 준공검사를 받지 않은 건축물의 양성화를 위한 ‘특정건축물정리에 관한 특별조치법’ 등이 대상이지만 처리하겠다는 의지는 그리 강하지 않다.
국회계류중 법률안 49건부처법률안국회제출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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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구기자 jkm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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