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선거 결과 미국의 상원은 동수의 공화당과 민주당 의원으로 팽팽한 균형을 이뤘다. 그러나 2001년 5월 버몬트주 제포드 의원이 공화당을 이탈함으로써 민주당은 다수당이 되었다. 제포드 의원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보수적 정책을 지지하는 것이 지역구의 이익에도 반하고 개인의 신념과도 맞지 않기 때문에 무소속으로 남겠다고 선언했다. 국내외의 언론은 그의 소신 있는 행동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지만, 그가 탈당의 대가로 민주당으로부터 한 상임위원회의 위원장직을 받았다는 사실은 주목을 끌지 못했다.
▼국민 우습게 아는 정치인들▼
이는 정치는 명분싸움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미국 의회에서 상임위 위원장은 독재자에 비유될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누린다. 비록 제포드 의원이 뒤로는 실리를 챙겼겠지만 이를 대놓고 비난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행동이 과거의 표결기록이나 명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분은 실리를 얻기 위한 겉포장에 불과하지만 정치에서 명분 없이는 실리도 없는 것이다.
민주당의 전용학 의원과 자민련의 이완구 의원이 한나라당에 합세했다. 물론 이들의 선택이 철저히 개인적 실리를 챙기기 위한 것이라 해도 자신들의 행위를 합리화할 명분만 있다면 탈당 자체를 나무랄 수는 없다. 하지만 전용학 의원은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 공격에 앞장섰던 민주당 대변인 출신으로 어떻게 하루아침에 “이회창 후보야말로 새시대를 이끌어갈 지도자”라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해명해야 한다.
우리 정치인들이 명분 없는 탈당을 감행할 수 있는 이유는 한마디로 국민이 제 구실을 못하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 국민을 우습게 아는 이유는 선거 때마다 저질 정치인을 확실히 응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민단체들의 선거운동이 제약을 받아 유권자에게 확실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하는 것도 한 이유이다. 이보다 더 큰 이유는 우리의 정당구조가 지역에 기반을 둔 양당제이기 때문이다. 저질 정치인이 선거에서 당선되는 데 아무 지장이 없는 이유는 양당제라는 독과점시장이 정당이 경쟁력을 발휘하지 않아도 생존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정부의 실패가 야당에 자동적으로 반사이익을 가져다주는 상황에서는 유권자를 우습게 볼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비록 선거용 정당이기는 해도 신당이 태동을 앞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국민의 반수 이상이 기존정당을 불신하고 있는 만큼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다. 또한 우리의 정치문화는 타협과 협상으로 양당정치를 실천할 만큼 성숙하지 않았다. 연정의 파트너로서 극한적 갈등에 완충작용을 하기 위해서나 우리 사회의 다양한 가치와 이익을 포괄하기 위해서도 신당은 반드시 필요하며, 필요에 의해 탄생하는 만큼 오래 지속되어야 한다.
민주당 의원들이 신당행 보따리를 쌌다 풀었다 갈팡질팡한다고 한다. 떠날 명분이 있는 사람은 떠나야 한다. 그러나 성격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 모여 ‘반(反) 이회창당’ 창당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의 정당사에서 민주당만큼 오랜 전통과 분명한 정체성을 가진 정당도 드물다. 게다가 노무현 후보가 진성당원 100%를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면 민주당이 신당과 무원칙한 합당을 하기를 바라는 민주당원은 많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색깔이 같은 사람끼리 헤쳐 모여 각자의 정체성을 확고히 한 다음 연대를 모색하는 것도 새로운 정치 실험이 될 것이다.
대선 후보들이 음성적으로 단일화를 하면 문제가 되겠지만 정책적 지향이 같은 정당끼리 공개적 연대를 하는 것은 문제될 것이 없다. DJP연대가 이념적 편차가 큰 지역정당끼리의 연대였기 때문에 한계를 보이기는 했지만, 우리 헌법으로도 정당간의 연정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미 보여주었다.
▼신당은 정체성 밝혀야▼
다만 신당이 어느 정당과도 연대할 수 있다며 자신의 정체성 없이 양당을 부정하는 반정당(anti-party) 정서에만 편승한다면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다. 신당이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원칙은 무엇이며, 정책의 우선 순위는 어떠한지를 먼저 밝혀야 한다. 그래야 의원들이 자당을 떠나 신당에 합류할 명분을 찾을 수 있고, 신당도 세를 키워 오래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철새들이 날뛸 때일수록 정당들은 정체성을 보다 확고히 함으로써 차별화를 해야 유권자들이 철새를 응징할 수 있다. 국민들이 이들의 기대를 완전히 배반한다면 가장 멋진 보복이 될 것 같은데….
조기숙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