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리안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은 죽음’. 사진제공 NDT
지리 킬리안의 안무는 음악과 춤의 절묘한 결합과 빼어난 조형미로 요약된다.
개막에 앞서 16일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있었던 ‘프레스 공연’(취재진을 상대로 한 리허설)에서 네덜란드 댄스 시어터는 인간의 몸을 매개로 하는 무용예술의 무한한 가능성을 다시 한번 예고했다.
베베른의 현악 4중주를 사용한 ‘더 이상 연극은 아니다(No More Play)’는 삼각형, 사각형으로 교합된 빛에 의해 현대적 감각의 차가운 이미지로 무대를 지배한다. 적당한 느림과 부드러움, 그리고 순간적인 빠름으로 강렬하게 솟아오르는 무용수들의 인체가 무작위적으로 난무한다. 무용수의 몸은 몸이 아니라, 끈적한 세포들의 접합과 이합처럼 사지의 방향이 불분명하며 무용수들의 움직임도 소름끼치도록 정교하고 아름답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을 사용한 ‘작은 죽음(Petit Mort)’은 리듬에 따라 몸을 변화무쌍하게 변주시키는 현란한 안무 감각이 눈부시다. 음표가 길게 늘어지면 남자 무용수에 안긴 채 다리를 쭉 뻗어 공간을 채우고, 음이 짧으면 좌우로 고개를 흔들게 하는 등 무용수들의 변환 기교가 절묘하게 음악과 맞아 떨어졌다.
폴 라이트풋의 안무작인 ‘쉬-붐(Sh-Boom)’은 음악과 춤의 추상적인 만남이 주조인 킬리안의 안무 스타일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다만 앞의 작품에서 보여준 차가운 색조와 절제가 자아내는 긴장감이 다소 느슨해진 인상을 준다.
킬리안은 조형 예술가다. 그의 움직이는 조각들은 절묘하고 섬세하다. 하지만 무용수의 개성을 드러냄으로써 관객과 교감하려는 요즘 무용계의 추세와 달리 킬리안의 작품은 철저하게 계산된 리듬과 절묘하게 짜여진 움직임만으로 공간을 채운다. 개인의 감성이 그 공간을 헤집고 들어갈 여지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킬리안은 여전히 건재하다. 어떻게 인간의 몸을 저렇듯 세포가 분화해 가듯 자유롭게 만들 수 있을까? 음악과 몸을 매개로 한 조형미의 완벽성, 바로 거기에 해답이 있다.
장광열 무용평론가·국제공연예술프로젝트 대표
iyskorea@unite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