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맹호
‘삼국지’ ‘춘아, 춘아, 옥단춘아 네아버지 어디 갔니’ ‘반지의 제왕’ ‘신기한 스쿨버스’ ‘아름다운 바다’. 품격있는 대담집을 비롯해 베스트셀러인 중국고전과 판타지소설, 어린이책을 아우르는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민음사와 그 자회사인 황금가지, 비룡소, 사이언스 북스가 펴낸 책이란 점이다. 이들 회사들은 한 주에도 몇 권씩 탐나는 신간을 보내와서 특정 출판사의 책을 편중되지 않게 소개하려는 신문사의 북섹션 담당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좋은 책, 또 잘 나갈만한 책들을 만들어 내는 이들의 출판사의 중심에는 민음사의 박맹호 사장이 있다. 박 사장은 14일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을 받았다. 66년 문학과 인문학 출판을 표방한 민음사를 창립해 지금까지 3000여종의 단행본을 펴낸 공로 덕분이었다. 출판계에서는 그를 책농사뿐 아니라 자식농사에서도 성공한 ‘농부’로 평가한다.
역사와 규모(3년째 매출 1위)면에서 탄탄한 회사를 키워낸 데다, 큰딸 상희(비룡소 이사), 큰 아들 근섭(황금가지 상무), 막내아들 상준(사이언스북스 실장) 등 2남1녀가 모두 성공적으로 자회사 경영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사장 일가를 만나 ‘출판명가’를 지켜가는 이야기를 들었다.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간다
올해 칠순을 맞은 박사장은 서울 신사동 강남출판문화센터 5층 사무실에 맨 먼저 출근한다. 나오자마자 책 주문장부터 훑어보며 독자 반응을 알아본다. 그는 “출판은 너무 마력적이다. 나는 출판에 중독돼 있다. 다시 태어나도 출판을 하겠다”고 말한다.
그는 ‘출판에선 개성이 가장 중요하다’며 차별화 전략을 내세웠다. 그에겐 시대를 한 발 앞서 읽는 본능적인 감각도 있었다.
그래서 남이 안하는 시집과 창작집을 내서 성공했다. ‘오늘의 시인 총서’를 통해 시집의 가로쓰기 시대를 열었고 시 대중화 작업의 씨앗을 뿌렸다. ‘오늘의 작가상’과 ‘김수영문학상’을 통해 이문열 한수산 등 소설가와 황지우 장정일 등 시인들이 이름을 높였다.
‘삼국지’도 그렇다. 그 시대에 맞는 언어 감각으로 쓴 고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만들어 1300만부가 나갔다. 사람들이 북디자인에 관심을 두지 않을 때 그는 민음사 편집장을 지냈던 정병규씨의 감각을 알아채고, 이 분야 개척자가 되라고 강권했다.
‘예전이나 현재나 출판은 벤처’라는 지론을 가진 그는 후배들에게 돈을 좇기보다 늘 시대가 요구하는 책을 펴내라고 조언한다.
“적수공권으로 시작해 오늘에 이른 것은 다행히 우수한 인재들을 만났고 그들이 열심히 일해준 덕분이다. 출판 덕분에 젊은 사람들 만날 수 있었다. 창조적 작업을 해서 내 자신이 굳어지지 않는 것 같다.”
●패밀리 비즈니스 no, 비즈니스 패밀리 yes!
아버지와 3남매는 매주 월요일 간부회의에서 만난다. 개성과 취향이 다른 자식들이 회사 경영에 참여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아버지는 지나치게 간섭하거나 굳이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경영수업은 어떻게 시켰냐고 물으면 그는 ‘아이들이 각개약진한 것’이고 말한다.
“시골에서 운수 정미업을 하던 아버지가 가업을 잇기를 바랐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나도 가업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강조하는 세상살이의 키노트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 “젊은 얘들이라 그런지 우리 아이들은 다 에고이스트다. 그 사람을 신뢰하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고 말해준다”
자식들은 출판인으로서 아버지를 존경한다.
“40년 출판한 아버지의 내공을 당할 수가 없다. 출판인과 편집인으로서의 감각은 소름끼칠 정도다.”
고미석기자 mskoh119@donga.com
박상희 박근섭 박상준 (왼쪽부터)
●비룡소와 박상희
92년 어린이책 전문출판사로 출범했다. 94년부터 회사일에 참여한 박상희씨(40·서울대 조소과 졸)는 출판에 대한 아버지의 뜨거운 정열을 가장 많이 물려받은 딸. ‘출판을 하도록 이끌어준 아버지가 고맙다’고 말한다. 미술이 전공이어서 그림도 알고 엄마로서 감수성도 지녔다는 것이 아버지의 평. 맏딸은 ‘아버지의 열린 마음과 젊은 감각’을 좋아한다.
●황금가지와 박근섭
민음사의 무겁고 진지한 이미지에 비해 황금가지는 쉽고 재미있는 책, 각 분야 최고의 작품을 만든다는 취지를 갖고 96년 창립됐다. 근섭씨(38·서울대 경제학과 졸)가 독자적으로 대중출판분야를 개척해 왔다. “제일 쉬운 출판은 누구나 좋다고 하는 책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 요건을 충족하면서도 사랑받는 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을 늘 기억하려 애쓴다.
그는 출판은 콘텐츠를 다루는 사업이기 때문에 앞으로 영역을 확장해나갈 계획이다.
●사이언스 북스와 박상준
97년 과학도서 전문 브랜드로 출범했다. 미국에서 멀티 미디어를 전공한 상준씨(30·서울대 산업공학과 졸)는 2001년부터 합류했다. 교양 과학을 근간으로 한 종합출판사가 그의 바람. “아버지께선 책 만드는 일은 로켓 제작과 같다고 하셨어요. 작은 부품 한 가지만 망가져도 로켓은 폭발합니다. 출판도 글자체 하나, 색깔 한 가지도 꼼꼼히 실수없이 만들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