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핵개발 프로그램에 관한 보고자료를 검토하는 정세현 통일부 장관 - 박경모기자
북한이 94년 제네바합의 이후에도 비밀리에 핵 개발 프로그램을 진행해 온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추진해 온 ‘햇볕정책’은 기로에 서게 됐다. 대북지원과 협력을 통해 북한을 변화시켜 정상적인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만든다는 햇볕정책의 ‘선공후득(先供後得·먼저 주고 나중에 얻는다)’ 원칙이 북측의 핵개발 시인으로 사실상 명분과 설득력을 잃게 됐기 때문이다.
심지어 일부 전문가들로부터 “북한의 본질이 변하지 않았는데 자재를 지원해 경의선과 동해선을 연결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6·29 서해교전 때 북측의 ‘애매한 유감표명’을 서둘러 수용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 비난을 샀던 정부측은 이번에도 처음부터 ‘대화를 통한 해결’에만 초점을 맞추는 자세를 드러내 거센 비판을 받고 있다.
중앙대 제성호(諸成鎬·법학과) 교수는 “정부가 각종 지원을 매개로 한 교류에 집착해 햇볕정책을 추진하는 동안 민족생존권이 걸린 핵문제의 심각성이나 해결의 당위성 등이 모두 가려졌던 것이 사실이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이제는 북한이 공식적으로 핵개발을 시인한 만큼 앞으로 남북협의 과정에서도 핵문제의 해결을 포함한 군사안보문제와 사회·문화 분야의 교류를 균형적으로 추진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부가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의 방북(3∼5일) 이후 이미 북한 핵개발 사실을 확인하고서도 북한측에 철도 연결 자재지원을 합의(13일)한 것도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한 전문가는 “켈리 차관보의 방북 직후 북한 핵개발 사실을 알았다면 경의선 철도 자재지원과 북한식량지원 문제를 나중으로 미루고 핵개발 대응책을 먼저 세워야 하는 게 순리가 아니었느냐”고 지적했다.
아무튼 최근 불거진 ‘4000억원 대북 비밀지원설’로 남북관계에 뒷거래가 있지 않았느냐는 의혹이 증폭되고 있는 상황에서 터져 나온 ‘메가톤급 악재’로 남북관계 개선 움직임은 당분간 주춤할 수밖에 없을 전망이다.
특히 북한 핵문제를 둘러싸고 미국의 움직임이 강경기류로 흘러 북한이 또 다시 한반도를 핵위기로 끌고 가는 ‘벼랑끝 전략’으로 나올 경우 남북관계가 전반적으로 경색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런 점에서 일단 북한이 19일부터 평양에서 열리는 장관급회담을 비롯해 각종 남북간의 교류협력 사업에 성실히 나오는지의 여부는 앞으로 북한의 핵문제 해결방향을 점치게 하는 시금석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일부 전문가들은 북한이 핵개발을 시인한 것은 적극적인 문제해결의지를 보인 대목이라는 평가도 내리고 있다. 서강대 김영수(金英秀·정치외교학) 교수는 “북한이 핵개발을 끝까지 숨긴 게 아니라 시인했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대화 해결의 의지를 보인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 교수도 “북한의 핵개발 자체는 ‘햇볕정책의 결과가 결국 이것이냐’는 반대론자의 목소리를 키우고 남남 갈등으로 번질 우려가 크다”고 지적했다.
김영식기자 spea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