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구멍/K C 콜 지음 김희봉 옮김/345쪽 1만5000원 해냄
《‘무(無)’ 또는 ‘없음’은 다루기 힘든 개념이다. 이 말들이 지칭하는 대상이 우리에게 낯설고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사실 무는 유의 대립항이거나 ‘있음’의 의미를 뒷받침해주는 보조적인 무엇으로 사용되기 일쑤다. 수학의 0도 마찬가지이다.》
0은 주로 다른 숫자의 뒤에서 자릿수를 표시하거나 빈자리를 채우는 수단으로만 간주되었다.
‘무’와 ‘0’에 대한 홀대는 근대가 시작되면서 더욱 두드러졌다. 데카르트에서 뉴턴으로 이어지는 근대과학 인식체계의 바탕에는 ‘입자라는 실체가 시간과 공간을 무대로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기계론과 이분법적 세계관이 깔려 있다.
이러한 세계관에서 ‘무, 없음, 진공’은 무언가로 채워져야 할 ‘부재’나 결핍으로 인식되었다.
과학의 역사에서 무와 진공이 무대로 나오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19세기에 패러데이가 전자기에 대한 연구를 통해 처음 장(Field·마당)의 개념을 제기하면서 “원자와 같은 입자는 장의 그물망 속에 나타나는 매듭이나 응집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획기적인 주장을 폈지만, ‘장’을 중심으로 한 인식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양자역학이 등장한 이후의 일이었다.
우주와 별들의 생성의 과정을 개념화한 상상도.동아일보 자료사진
따라서 현대과학의 역사는 ‘무’에 대한 인식 전환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우주의 구멍’은 이렇듯 다루기 힘든 주제를 놀랄 만큼 다양한 소재로 폭넓게 다루고 있다.
저자는 ‘없음’ ‘0’ 등의 이름으로 초라하게 찌그러져 있던 ‘무’를 끄집어내, 먼지를 털고 무대의 중심으로 올려놓는 어려운 작업을 비교적 훌륭하게 해내고 있다. 이 일은 최근의 물리학과 우주론의 난해한 개념들을 알기쉽게 풀어내 새로운 의미의 연관망을 짜야하는 만만치 않은 과정이다.
이 책에는 오늘날 이론물리학과 우주론의 최전선을 이루는 ‘초끈이론’ ‘브레인 세계이론’ 등과 중요한 과학자들의 발언이 두루 망라되어 있다. 이런 개념이나 이론이 일반인들에게 생소하게 들리는 것은 ‘무’를 다루고 기술(記述)할 도구와 어휘들이 비교적 최근에야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개념들을 이해하는데 쏟는 노력은 우리가 인식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인 셈이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무’가 비어있거나 결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로 가득 채워져 있으며, 우리가 지각하는 세계를 만들어낸 원천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빅뱅이론에 의하면 우리 우주는 무에서 태어났다. 우주에는 블랙홀을 비롯해서 수많은 구멍들이 있고, 암흑물질이라 불리는 ‘무’가 우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이것들을 그저 ‘무’, ‘구멍’이라고 부르지만 그것은 다만 아직 적절한 이름을 얻지 못한 무언가이다.
우리는 ‘무’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히면서 우리 자신과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획득한다. 그것은 이 세상에 ‘없음’이란 것은 없으며, ‘무’란 우리가 알지 못하거나 익숙치 못한 것들에 붙여놓은 잘못된 딱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김동광 과학저술가·고려대 강사 과학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