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중은 변덕스러워요. 저 사람도 한 달 이내에 잊혀질 겁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검투사 막시무스가 등장하자 환호하는 콜로세움의 군중을 바라보며, 루실라 공주가 코모두스 황제에게 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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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콜로세움인 멀티플렉스(복합상영관)의 검투사, 블록버스터 영화도 군중의 변덕에 좌우되기는 마찬가지다. 차이가 있다면 잊혀지는 기간이 점점 짧아진다는 것. 10주 넘게 상영되더라도 실제 ‘라이프 사이클’은 1주일에 불과하다는 것이 요즘의 블록버스터 영화들이다.
#1 ‘라이프 사이클’ 1주일의 블록버스터 영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할리우드 대작 영화들은 개봉 2주 째에 평균 40%의 관객을 잃는다. 최근 이 낙차 폭은 점점 커져가는 추세다. 지난해 ‘혹성탈출’은 개봉 첫 주말에 6850만 달러로 1위를 기록했으나 둘째 주에 60%, 셋째 주에 52%의 관객을 잃었다. 올해 ‘스쿠비 두’도 둘째 주에 흥행수입이 53% 줄어들었다 .
여름 성수기, 요란한 팡파르와 함께 개봉된 대작 영화들이 개봉 2주째가 되면 관객이 줄어들기 시작한다. 이를 보다 보면 메가플렉스는 일순간에 수천만 달러의 판돈이 오가는 도박장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다.
#2 첫 주 문화(First-Week Culture)의 확산
1972년에 영국 시인 위스턴 휴 오든은 “대중매체가 제공하는 것은 음식처럼 소비되고 곧장 새 접시로 대체되는 엔터테인먼트”라고 갈파했다. 개봉 첫 주말 흥행의 비중이 커져가는 현상은 대중매체가 주는 오락의 이같은 속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오늘날의 엔터테인먼트 상품들은 ‘첫 주 문화(First-Week Culture)’의 확산을 가속화한다. 영화 뿐 아니라 TV 방송도 슈퍼볼 경기처럼 전국 이벤트로 치닫고, 음반도 발매 첫 주에 최대한의 수입을 거두기 위해 집중하는 ‘첫 주 산업’이 되어가고 있다.
관객들은 점점 더 1억 달러짜리 오락이 공개되는 현장에 기꺼이 참여하고 싶어한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 XP’가 발매 첫 주에 얼마나 팔렸는지 관심을 끌지 못하지만, 대작 영화의 개봉 첫주말 스코어는 주가처럼 꿰뚫고 있어야 월요일 오전 직장이나 학교에서 대화에 참여할 수 있다. 개봉 자체가 이벤트가 된 요즘 대작 영화를 첫 주에 보지 않는다면 그저 관찰자일 뿐, 진정한 참여자가 될 수 없다.
#3 첫 주 문화의 경제적 동인
영화사 입장에서 개봉 첫 주가 중요한 이유는 흥행수익 배분 비율 때문. 미국에서는 첫주 극장 상영 수입의 80∼90%, 둘째 주의 50∼60%, 셋째 주의 30∼40%를 영화사가 가져간다. 개봉 한 달 이후에야 비로소 극장 쪽이 유리해지는 구조다. 이 때문에 수천만 달러를 들인 대작 영화들이 개봉 첫 주에 반짝한 뒤 사라져도 영화사로선 별로 불리할 게 없다.
반면 한국에서도 개봉 첫 주의 비중이 커지는 추세지만, 흥행수익 배분 비율이 상영 기간과 상관없이 고정돼 있어 영화사가 얻는 이득이 없다. 요즘 한국 영화계가 할리우드와 가장 닮은 점은 ‘크게 치고 빨리 빠지는’ 식의 대규모 개봉과 개봉 첫 주에 집중된 마케팅. 이를 ‘할리우드식 개봉 패턴’이라고 하지만, 실제 할리우드 식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