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여성, 루의 이야기/파이야르 출판사 2002년 7월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갈파한 시몬 드 보부아르의 말을 예고하듯 일찍이 자신의 사상과 행동을 만들어간 한 여성의 전기, ‘자유 여성, 루의 이야기’는 지난 두 세기 전 유럽 여성들의 자의식이 어떻게 발아했는가를 가늠해 보기에 적절한 책이다.
유태계 독일인 집안 출신으로 러시아에서 태어난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1861∼1937·사진). 빼어난 미모와 지성을 갖추고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엽까지 유럽 지성계를 풍미했던 그는 유럽의 1세대 ‘자유 여성’으로 꼽힌다. 작가이자 정신분석가로 활동했던 ‘루’는 자신의 소설(로딩카·1922)과 유고 자서전(나의 삶·1951)으로도 많은 독자를 갖고 있지만, 그녀의 삶을 신비스럽게 만드는 것은 ‘연애와 우애의 상대’였던 수많은 남성들이다. 철학자 니체, 서정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 등 당대 유럽의 최고 지성들이 바로 ‘루’의 연인이었다. ‘루’가 이들과 차례대로 애정 행각을 벌이며 학문적으로도 깊은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일화다.
1882년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에서 사제지간으로 니체와 처음 만난 21 세의 대학생 ‘루’. 그의 미모와 재능에 사로잡힌 니체로부터 열정적인 사랑의 고백을 받지만, ‘루’는 그의 사랑을 냉정하게 거부하여 그를 절망의 나락으로 빠트린다. 1897년 36세의 기혼녀 ‘루’는 당시 21세였던 릴케와의 ‘모성적 연애’를 통해 감수성 많은 젊은 시인의 시정을 폭발시키는 뮤즈로 변신한다. 남편과 사별한 뒤 1911년, 50이 넘어 만난 프로이트에게서 ‘루’는 정신분석학의 가르침을 받으며, 연인이자 친구로서 평생 절친한 관계를 맺는다.
이처럼 생을 마칠 때까지 거리낌없이 사랑의 향연을 펼친 ‘루’의 이야기는 프랑스에서도 이미 수 차례 선을 보인 바 있다. 그럼에도 이번 전기가 특히 독자들의 눈길을 끄는 까닭은 여성부 및 문화부 장관(1974∼1977)을 지냈던 여성 저널리스트 프랑스와즈 지루가 페미니스트적 시각으로 ‘루’의 삶을 재조명했기 때문이다.
책의 마무리 부분에서 지루는 여성운동가로서의 자신의 삶을 ‘루’의 자화상에 투영하듯, “그가 누린 자유의 근원은 무엇보다도 ‘경제적 자립’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자유 여성의 현대적 정의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을 지닌 여성’”이라고 풀이한다.
자유분방한 삶 속에서 아무런 후회나 유감없이 살았던 ‘루’, 여성으로서의 행복감마저 느꼈던 유럽의 첫 ‘자유 여성’을 우리의 도덕적 잣대로 판단하기 전에, 시대에 앞서 용감히 자신의 삶을 선택한 여성 선각자의 개인적 결정을 존중해 주어야 할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이 억지는 아닐 듯싶다.
임준서 프랑스 LADL 자연어처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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