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이 충분치 않은 르벨은 주변 친지들을 설득해 ‘곰가죽’이라는 일종의 펀드(조합)를 구성했다. 르벨을 포함한 13명의 조합원은 큰 부자가 아니라 은행가 법률가 등으로 성공한 직업인이었다. 약관에 따르면 조합원들이 연간 250프랑씩 출자해 만든 2750프랑(13명중 2명은 공동투자자였기 때문에 250프랑×11)을 미술품에 투자하고 10년 후 작품을 팔아서 출자한 비율대로 수익을 배분한다는 것이었다.
주목할 만한 내용은 펀드를 해체했을 때 생기는 순이익 가운데 20%는 작가들에게 되돌려 주겠다는 것이다.
이 약속은 정확하게 실현되어 작품을 판 화가들에게 상당한 배당금을 안겨주었다. 작가들이 작품의 재판매에서 생기는 이익의 일부를 받을 수 있는 권리는 1920년 프랑스를 필두로 유럽국가들이 제도화하여 사후 70년까지 작가나 상속인에게 작품 판매이익의 일정부분을 지급하도록 했다. 르벨은 이 펀드가 투자목적임을 분명히 했지만 그 이상의 뜻이 있었음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르벨은 시장에서 팔리지 않는 젊은 작가들의 작업실과 화랑을 누비고 다니며 작품을 사들였다. 당시 르벨의 신세를 진 대표적인 작가가 피카소와 마티스였다. 피카소는 르벨의 초상화까지 그려줬을 정도다. 특히 그림이 팔리지 않아 생계에 어려움을 겪던 마티스에게 르벨은 구세주와 같은 존재였다. 사실 마티스는 당시 작업에 전념하기 위해 작품을 지속적으로 사줄 애호가들로 구성된 일종의 신디케이트를 구상하고 있었으며 르벨이 여기서 힌트를 얻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르벨이 가장 자주 방문해 그림을 샀던 곳은 ‘베르트 베유 화랑’이었다. 결혼지참금 4000프랑으로 화랑을 연 젊은 여성 베유는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야수파나 입체파 같은 동시대 신진작가들만을 지원했으며 르벨과 공감대를 가지고 있었다. 베유는 피카소의 작품을 판 최초의 프랑스 화상이었다.
르벨의 활약에 힘입어 아방가르드 작품시장은 서서히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고 이에 자극받아 보수적인 정상급 화랑들도 신진작가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르벨이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기존 화상이나 콜렉터들은 인상파나 후기인상파 작품에 주력하고 야수파나 입체파 같은 작품에는 관심이 없었다. 르벨은 20세기 초 미술시장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사 가운데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곧 공식 출범할 것으로 보이는 ‘컬렉터단체’가 국내 미술시장의 ‘곰가죽’이 되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곰가죽’에 관한 얘기는 ‘피카소 만들기, 마이클 C. 피츠제랄드 지음/이혜원 옮김, 다빈치 간행’을 참고했음.)
김순응 서울옥션대표 soonung@seoulauctio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