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여간의 한국 복무를 마치고 다음달 이임하는 대니얼 R 자니니 미8군 사령관. - 전영한기자
‘주한미군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인가.’
한국인이면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해 봤을 문제다.
지난 50여년 동안 다수의 한국인은 미군이 한반도 안보의 일정 부분을 담당하는 혈맹임을 충분히 인식해 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미군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일부의 태도도 보여줬다. 이 와중에서 한강 독극물 방류와 용산기지내 아파트 신축에서 6월 궤도차량에 의한 여중생 사망에 이르기까지 주한미군이 관련된 사건들이 연이어 터져나와 곤혹스럽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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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제들에 대한 미군측의 생각을 알아보기 위해 용산기지내 미8군 사령부로 대니얼 R 자니니 사령관(57·중장)을 찾았다. 리언 라포트 한미연합 사령관에 이은 주한미군 ‘2인자’로 통하는 그는 최근 발생한 미군 관련 사건들이 모두 미8군 관할인 탓에 일부 시민단체들의 추방 요구에 시달리기도 했다.
갑자기 뚝 떨어진 기온으로 어깨가 움츠러든 21일 정문을 지키고 있는 수십명의 전투경찰 사이를 통과해 미8군 영내로 들어서자 새뮤얼 테일러 공보실장(대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8명의 부관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사령관 대기실에서 테일러 실장은 “솔직히 지금 미국 대통령이 한국에서 인기가 높다고 할 수 없는데 미군 관련 사건들이 겹치면서 한국민의 감정이 악화되고 있다”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우리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미군은 ‘불편하고 귀찮은’ 존재인가
요즘 자니니 사령관은 매일 30분 간격으로 사람을 만날 정도로 매우 바쁜 일과를 보내고 있다. 한국을 떠날 때가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주한미군 3만5000명 중 2만6000명을 차지하는 미8군의 총책임자인 자니니 사령관은 다음달 5일 이임한다.
“한국 기자와의 단독 인터뷰는 2년 만에 처음”이라는 그는 기자와 만나는 1시간30여분 동안 군인 특유의 솔직한 태도로 곤혹스러운 질문에도 거침없는 답변을 이어갔다.
자니니 사령관은 과거 미8군 사령관들에 비해 한국에 많이 알려진 편. 한국의 정치, 기업, 언론계 인사들과 비교적 자주 만난 덕분이다. 그는 미8군 사령관으로서 한국민들과의 좋은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대북(對北) 안보만큼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한다. 특히 지금은 더욱 그렇다. 과거 한미 동맹관계가 한창 무르익어 있을 당시 한국인들이 미군에 대해 가졌던 우호적인 감정이 이제 거의 정체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에서 미군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렇지만 그런 감정은 성공적인 동맹관계의 당연한 결과라고 봅니다. 얼마 전 북한이 핵개발을 시인했지만 그 때문에 안보에 대해 걱정하는 한국인들은 거의 없었을 겁니다. 안보에 대한 인식이 변한 거죠. 한미 관계는 탄탄해졌고 그러다 보니 미군은 이제 한국인들 사이에 거의 ‘불편하고 귀찮은’ 존재로 받아들여지는 거죠.”
기자가 주한미군 관련 사건들에 대해 ‘논란’이라는 표현을 쓰자 자니니 사령관은 곧바로 ‘오해’ 또는 ‘난관’이라는 단어가 더 적절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한다. 두 표현의 차이를 묻자 그는 어떤 관계이건 ‘오해’와 ‘난관’은 존재한다고 답한다. 미군 관련 사건들은 한미 관계를 더욱 굳게 만들 수 있는 ‘기회’이지 결코 ‘도전’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방인의 벽’ 허물 수 있나
내친 김에 얼마 전 발생한 미8군 기름유출 사건에 대해 물어봤다. 5월 용산기지에서 흘러나온 기름이 인근 지하철역을 오염시킨 데 이어 최근에는 용산기지 내 미군 숙소와 미군의 종교휴양소가 있는 남산 부근까지 오염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미군은 환경오염 사실을 시인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할 것을 약속했다”면서 “그렇지만 한국인들이 용산기지의 열악한 생활조건에 대해 조금은 이해해 줬으면 한다”고 말한다.
“과거 용산 미8군 하면 누구나 다 와보고 싶어하던 곳이었습니다. 지금의 압구정동이나 명동쯤 될까요. 그러나 지난 30∼40년 동안 서울의 다른 지역은 몰라볼 정도로 바뀐 반면 용산은 그대로입니다. 개발 규제에 묶여서 오랜 건물들이 그대로 방치되다 보니 기름유출 같은 사고가 발생하곤 합니다. 지난 수십년간 용산기지 내에 새로 지은 건물은 그래곤힐 라지(호텔)뿐입니다. 숙소가 턱없이 부족하다 보니 결혼한 미군 중 가족을 한국에 데리고 오는 경우가 10%에도 못 미칩니다.”
일련의 미군 관련 사건들을 접하면서 한국인들은 그동안 미군과 일부 한국인 사이에 형성된 ‘단절의 벽’을 새삼 깨닫게 됐다. 50년이 넘는 주둔 역사에도 불구하고 주한미군은 ‘이방인 사회’를 형성해 온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미군은 한국 사회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한 것 아니냐”고 묻자 자니니 사령관은 “맞지만 틀리다”고 답한다.
“대다수 젊은 미군들은 첫 해외 주둔지로 한국에 옵니다. 외국 문화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죠. 그런데 미군들은 일년이 지나면 주둔지를 옮겨갑니다. 그러다 보니 동두천 의정부 문산 등 서울 근교의 제2사단에 배치된 대다수 미군은 자신들만의 문화를 만들고 거기에 만족하게 됩니다. 제2사단 소속 미군이 일년 동안 서울에 나오는 것은 6, 7번에 불과합니다. 한국의 주류 문화에 어울릴 기회가 없는 거죠. 반면 한국에 비교적 오래 머무르는 상급 군인들은 한국 문화에 잘 적응합니다. 한국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요.”
●군대는 단순한 직업 이상의 것
37년에 걸친 군대 생활 동안 미국내 12개 주와 유럽, 중동 국가들을 두루 돌아다닌 그는 베트남전 당시 징병돼 군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다. 당연히 “군대가 좋아서 들어왔다”는 공치사는 그로부터 들을 수 없다.
91년 걸프전 당시 ‘사막의 폭풍’ 작전에 여단장으로 참가했던 그는 2000년 서울로 오기 전 워싱턴 국방부 내 엘리트 부서로 통하는 훈련교리사령부(TRADOC)의 전투개발 부참모장으로 근무했다. 동북아 지역에서 일하고 싶었던 차에 한국으로 발령이 나자 그는 단숨에 서울로 달려왔다.
지난 2년 동안 그의 눈에 비친 한국인은 어떤 사람일까. “간혹 감정적이지만 겸손한 사람들”이다. 특히 올 여름 월드컵 기간에 그는 한국인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월드컵 4강까지 오르는 동안 한국인들은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그러나 그 자신감은 겸손한 것이었다. 그는 한국인들을 “승리와 패배를 모두 품위있게 받아들일 줄 아는 민족”이라고 평한다.
한국을 떠나는 그의 감회는 남다르다. 이번을 끝으로 완전히 군 생활을 마감하기 때문이다. 그는 “전쟁 빼놓고 군대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고 추억한다. 군대가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없는 직업이 돼가고 있지만 자신을 관리하고 판단 능력을 키우며 사회에서 개인의 역할을 깨닫는데는 군대만큼 좋은 곳도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사람들은 그에게 묻는다. 왜 그렇게 사랑하는 군대를 떠나느냐고. 그것은 한국에서만큼 만족스럽고 보람있는 임무를 끝으로 군 생활을 마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난 2년 동안 많은 사건들을 겪었음에도, 아니 그런 사건들을 겪었기 때문에 그는 한국을 잊지 못할지도 모른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기자가 자니니 사령관의 미래에 대해 ‘은퇴(retirement)’라는 표현을 쓰자 그는 이날 두 번째로 새로운 단어를 내놓았다. 그 단어는 ‘전환(transition)’이었다.
◎대니얼 R 자니니 약력◎
▶1945년 캘리포니아주 거스틴 출생 ▶네브래스카대 정치학과 졸업 ▶캔자스대 정치학 석사 ▶워싱턴 미육군대학 수료 ▶걸프전 ‘사막의 폭풍’ 작전 여단장 ▶미 외교협회(CFR) 수석 펠로 ▶미3군단 참모장 ▶미4사단 부사단장 ▶국방부 훈련교리사령부 부참모장 ▶2000년 9월 미8군 사령관, 유엔군사령부 참모장, 한미연합군사령부 참모장, 주한 미군사령부 참모장 부임 ▶2002년 11월 이임 예정
정미경기자 mickey@donga.com
▼자니니 여사 한마디▼
제인 자니니 여사(사진)는 남편인 대니얼 자니니 미8군사령관만큼이나 만날 기회를 얻기 힘들었다. 그동안 한국에서 벌여온 10여개의 자선활동을 마무리짓고 이삿짐을 싸느라고 정신이 없는 그는 막판까지 인터뷰 확답을 주지 않았다.
마감 직전 기자와 마주 앉은 그는 “서울을 떠나면서 가장 섭섭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친구들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은 너무나 맛있는 한국 음식”이라고 답했다. 그는 “지금 우리집 냉장고에는 적어도 3종류의 김치가 있다”면서 “틈틈이 한국 음식점을 찾아다니며 배운 요리 실력을 미국에서 발휘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10남매의 대가족 속에서 자란 자니니 여사는 활달한 성격. 그는 34년 전 파티에서 처음 만난 자니니 사령관에게 나머지 9명의 형제자매 이름을 모두 외워야만 데이트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참고로 10남매의 이름은 모두 영어 알파벳 ‘J’로 시작된다.
미국 경영학석사(MBA)인 그는 한국에서 미군 복지와 관련된 각종 위원회에서 활동해 왔다. 특히 그는 미8군 내 자선 선물가게인 ‘조선’을 꾸려온 것을 좋은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지난 2년 동안 이 선물가게에서 모은 10만달러의 수익금 중 절반은 한국 자선단체에 전해졌으며 나머지 절반은 미군 복지 프로그램에 쓰이고 있다.
남편의 복무지를 따라 26번이나 이사를 다닌 자니니 여사는 “군인의 배우자로서 4개의 ‘F’를 마음 속에 새기고 살았다”면서 “믿음(Faith), 가족(Family), 친구(Friends), 융통성(Flexibility)이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잦은 이사와 가족에 대한 책임 때문에 사회 경력을 쌓을 수 없어 고민도 많이 했다”면서 “그렇지만 지금 되돌아보면 인생을 꽤 잘 꾸며온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간 후의 계획에 대해 “워싱턴으로 가서 남편의 직장 잡는 일을 도운 뒤 캘리포니아에 사는 두 딸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자니니 여사는 “내년 4월 할머니가 될 예정”이라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