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세 여자의 위태로움이 각각 섹스에 대한 ‘거부’와 ‘집착’으로 표출되는 두 주인공 세진(왼쪽)과 인혜는 결국 한 인간의 두 얼굴인 셈이다./사진제공 극단 산울림
여자 나이 서른일곱, 그것도 독신. 불안하다. 위태롭다.
건축설계사 세진과 카피라이터 인혜, 동갑나기 두 여자의 위태로움은 각각 섹스에 대한 ‘거부’와 ‘집착’으로 나타난다.
‘성 불능과 사랑 불능이 삶에 대한 불능으로까지 전이된 상태’.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에 대한 세진의 이런 ‘명쾌한’ 분석은 삶의 모든 문제를 성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정신분석학의 ‘단순함’을 대변한다.
두 여자는 위태로운 삶을 벗어나기 위해 현재의 삶을 왜곡하는, 근원적 욕구에 대한 억압의 기억과 경험을 풀어헤친다.
세진은 정신과 전문의 강문규의 도움을 받아 무의식 속에서 깊은 ‘과거’를 끌어올린다. 생후 18개월에 부모를 떠나 외가로 보내진 상실감, 가족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의 갈구, 성폭행의 충격.
자신의 삶이 왜곡되기 시작한 지점을 알고 있는 인혜는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간다. 남자와 남자 사이를 사뿐사뿐 건너다니던 그는 전남편처럼 성불능인 새 애인 이진웅을 함께 치유하고 세진과의 관계를 재정리해 가면서 결혼의 ‘실패’를 딛고 안정을 찾아간다.
원작인 김형경씨의 동명 소설에서 교차되던 두 이야기의 흐름은 반원의 무대를 둘로 갈라 진행함으로써 그 동시성이 강조되고, ‘현재진행형’인 인혜와 진웅의 사랑은 무대 뒤쪽에 설정된다. 여성심리의 묘사에 뛰어난 역량을 보여 온 원로 연출가 임영웅씨는 현재의 의식과 행위를 무대 안쪽으로, 뒤로 물러서게 하고 과거의 기억과 무의식을 무대 전면으로 끌고 나온 것이다.
희박한 자아존중감, 사람에 대한 애착의 결여, 사랑에 대한 갈망의 결핍, 삶의 궁극적 목표 상실,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만큼 막다른 지점에 도달했다는 느낌. 세진과 인혜는 이런 위태로운 지점에 도달한 37세 여자의 두 얼굴이다.
절제된 대사와 철저히 계산된 무대의 빛과 그림자는 두 얼굴을 하나로 묶어낸다.
‘30대’의 두 여배우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2000년 동아연극상 연기상 부문 수상자인 만년 동안(童顔)의 이항나씨(세진역)는 복합적 감정의 격랑을 ‘눈물이 쏙 빠지게’ 펼쳐놓고, 한국 연극연출가 협회 선정 우수 연기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박지오씨는 자기의식의 흐름을 냉정하게 관조하는 인혜 역을 ‘얼음처럼 차갑게’ 해낸다. 강문규 역의 박용수, 이진웅 역의 안관영씨의 안정된 뒷받침도 이들의 연기를 돋보이게 한다.
원작에서 정신분석과 페미니즘의 현학과 수다로 인해 가려지곤 했던 메시지는 네 연기자의 생동감을 통해 되살아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문제는 깊은 속내를 털어놓을 만큼 서로 신뢰하고 배려할 수 있는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해결점을 찾아갈 수 있다는 것. 정신분석은 그 ‘사랑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라는 것.
12월29일까지. 화 목 금 7시반, 수 토 공휴일 4시 7시반, 일 3시(월 쉼). 소극장 산울림. 1만5000∼2만원. 02-334-5915, 5925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