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들의 라이프스타일과 의식이 달라지고 있다. 가정 경제를 떠맡는 가장으로서 무거운 책임에 짓눌렸던 과거와 달리 자신에게 투자하고 스스로 즐거움을 누리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는 것.
자녀를 갖고 싶어하지 않거나 노후에 자녀로부터 경제적 부양을 받을 생각이 없는 기혼 남성이 늘어난다. 그리고 집안 일을 아내와 나눠서 하는 것은 당연시한다. 피부관리 등 외모 가꾸기에 지출하는 것을 ‘투자’라고 생각한다. 아내와 여자친구를 제치고 인터넷 쇼핑몰의 ‘큰 손’ 쇼핑족으로 떠오르고 있다.
상명대 가족복지학과 최연실 교수는 “30, 40대 기혼 남성들이 개인주의화하면서 자신에게 투자하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며 “특히 자녀에게서 노후의 경제적 부양은 기대할 수 없고 아이를 키울 때의 심리적 즐거움은 있지만 그를 위해 치러야 할 부담이 크기 때문에 차라리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기혼남성이 느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노후에 자녀에게 기대지 않겠다
동아일보 위크엔드팀은 네이버, 한게임 등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하는 NHN의 여론조사 자회사 폴에버와 함께 가족과 자녀에 대한 20대이상 남성들의 의식을 설문조사했다.
총 2235명이 참가한 이번 조사에서 자녀가 없는 기혼 남성 168명 가운데 ‘앞으로 아이를 낳겠다’는 비율은 82.7%였지만 ‘낳지 않겠다’는 대답도 11.3%였다. 잘 모르겠다는 응답은 6.0%였다. 특히 응답자 중 자녀가 없는 기혼남성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30대는 124명 가운데 8.1%인 10명이 자녀를 갖지 않겠다고 답했다.
결혼적령기의 미혼 남성에게서는 ‘결혼 뒤 자녀를 낳지 않겠다’는 비율이 더 높게 나타났다. 20대 미혼 남성 응답자 589명과 30대 미혼 454명 가운데 ‘결혼 뒤 자녀를 낳지 않겠다’는 응답은 각 20.5%였다. 결혼 적령기 미혼남성 10명 중 2명이 자녀를 원하지 않는 셈이다. 자녀가 있는 남성 1057명 가운데 ‘노후에 자녀로부터 경제적인 부양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비율은 70.6%였다. 자녀가 있는 30대 기혼남성(658명)의 71.7%, 40대 기혼남성(227명) 의 79.3%였다. 그러나 자녀로부터 부양을 기대하지 않는 남성 가운데 실버타운에 들어갈 의향이 있는 비율은 33.2%에 그쳐 아직까지 실버타운이나 양로원 등에 대한 거부감은 여전한 것으로 분석됐다.
최 교수는 “히피문화의 영향으로 가족에 대한 전통적 가치가 무너졌던 80년대 초반 미국사회에서조차 자발적으로 아이를 낳지 않은 가정의 비율은 5%대에 불과했다”며 “11%의 기혼남성이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응답한 것은 비록 실질적인 행동이 아니라 의식수준에 불과하더라도 높은 수치”라고 설명했다.
최 교수는 이번 설문이 무작위 추출된 표본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어서 통계적 의미를 부여하기 어려우며 인터넷 이용자들의 학력과 소득수준이 상대적으로 높고 덜 보수적인 성향을 가졌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같은 수치는 의미있는 트렌드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가족보다 건강에 더 관심
한편 같은 조사에서 ‘자신을 가꾸기 위해 피부관리도 받을 수 있다’고 답한 남성은 전체의 67.9%였다. 연령대별로 보면 20대 남성(671명)의 74.1%, 30대(1122명)의 68.4%, 40대(290명)의 57.6%였다.
‘아이를 위해 내 시간을 희생하기보다 주말에 여행을 다니는 식으로 자신에게 투자하겠다’는 남성의 비중은 연령별 편차가 별로 없이 평균 48.7%로 나타났다.
서강대 교육학과 정유성 교수는 “개인의 가치를 중시하는 것은 산업사회 말기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지만 한국에서는 보다 급격히 나타나고 있다”며 “1997년말 경제위기 이후 한국 남성의 직업 안정성이 낮아졌고 삶에 자신이 없다 보니 책임회피 현상의 하나로 자녀를 원하지 않는 남성이나 자신에게 몰두하는 남성이 늘고 있다”고 분석했다. 정 교수는 “20대 남성뿐만 아니라 실제 자녀를 키우고 있거나 조만간 키워야 하는 30∼40대 남성에게서도 자녀기피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한국의 육아 비용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이기도 하다”며 “(아버지가 치러야 하는) 물질적 비용만이 아니라 아이를 잘 키워야 한다는 강박관념 등의 심리적 비용도 크다”고 말했다.
제일기획에서 지난해 서울과 경기 분당신도시에 거주하는 20∼40대 기혼 남성 700명의 라이프 스타일을 조사한 ‘아저씨의 생활 및 의식 조사’는 이 같은 분석을 뒷받침한다.조사대상자 중 직장을 옮긴 경험이 있는 남성은 49.2%였고 평균 이직 횟수는 2.34회였다.헤어스타일을 살리기 위해 패션염색을 하는 사람(19.6%)이 적지 않았다.특히 평균 결혼 연수가 6.52년이고 평균 연령이 34.04세인 대졸 이상 사무직 종사자 140명의 경우 건강이나 질병에 대한 관심이 71.4%로 가장 높았으며 가족(46.4%) 재산증식(36.4%)이 그 뒤를 이었다. 자녀교육에 대한 관심(32.1%)은 직장(35.0%)보다 순위에서 밀렸다. 그러나 최근 한달 동안 가정에서 집안청소(72.1%) 설거지(56.4%) 이불 개기(42.9%) 세탁(35.7%) 화장실청소(35.0%) 식사준비(33.6%) 등을 했다고 답해 가사에 참여하는 비율은 높았다.
●온라인 쇼핑몰의 ‘큰손’ 남성들
아이나 가족보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남성의 라이프스타일은 온라인 쇼핑몰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온라인쇼핑몰의 남성고객 비중이 커지고 남성들이 선호하는 상품이 많이 팔리고 있는 것.
대표적 인터넷 쇼핑몰인 인터파크에 따르면 10월중 이 사이트를 통해 물건을 산 경우는 26만건이었으며 이 가운데 남성이 주문한 건수가 46%였다. 그러나 남성의 비중은 매출액으로 따지면 훨씬 커진다. 올 상반기 매출액 593억원 가운데 남성고객의 비중은 60%.
인터파크의 이종환 마케팅 팀장은 “직장생활에 쫓겨 시간이 없는 데다가 쇼핑 자체를 꺼리는 남성들이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고 여유시간을 활용할 수 있는 온라인 쇼핑몰에서는 쇼핑을 즐긴다”며 “한 번 구입할 때 지출비용이 여성은 평균 8만5000원인데 비해 남성은 두 배에 가까운 15만원”이고 말했다.
남성들이 즐겨 찾는 품목은 홈시어터 캠코더 등의 가전제품과 인라인스케이트, 산악용자전거(MTB) 오토바이 마라톤 등산 스키 골프 용품 등 주로 개인적인 놀이를 위한 것이었다.
한편 남성용 화장품을 사는 남성도 크게 늘고 있다. 올 7월 처음 마련된 남성용 화장품 코너의 매출액은 첫달 1900만원에서 10에는 월 2400만원 가량으로 늘었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화장품을 살 수 있는 온라인 쇼핑몰을 자주 이용하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남성용 파운데이션 같은 색조화장품 판매량도 꾸준히 늘고 있다.
하임숙기자 arteme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