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상반기에 소형 승용차 판매고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4% 늘어난 데 비해 중형과 대형 승용차 판매량은 각각 11.2%, 25.7% 증가했다. 중형차는 14만4780대, 대형차는 5만3774대가 팔려나갔다. 그러니 중·대형 승용차 소유자를 대상으로 정유업계의 ‘귀족 마케팅’이 활발해진 게 놀랄 일은 아니다.
고급 휘발유를 만들어 파는 정유사들은 “고급 휘발유에는 옥탄가 향상제와 청정제를 더 많이 넣었기 때문에 보통 휘발유를 사용할 때보다 엔진 출력이 크게 증강된다”고 주장한다. 휘발유의 옥탄가가 높을수록 엔진의 성능이 좋아지는데, 보통 휘발유의 옥탄가가 91∼94이고 고급 휘발유는 95∼98에 이르므로 그 차이만큼 엔진 출력이 커진다는 얘기다.
과연 고급 휘발유를 사용하면 늘어난 기름값 부담을 감수할 만큼 엔진 출력이 커질까?
휘발유 엔진은 휘발유와 공기의 혼합기에 전기불꽃을 발생시켜 출력을 얻는다. 이때 공급되는 연료의 양이 똑같다 해도 전기불꽃을 언제 만드냐에 따라 엔진의 출력이 달라진다. 전기불꽃을 발생시키는 시점을 점화시기(spark timing)라고 하는데, 점화시기를 앞당겨주면 엔진의 출력이 어느 범위까지는 좋아진다.
하지만 그 범위를 넘어서면 노킹(knocking)이라는 비정상적인 현상이 일어난다. 노킹이 생기면 오히려 엔진의 출력이 떨어질 뿐 아니라 심해지면 엔진이 파손될 수도 있다. 휘발유의 옥탄가(octane number)란 노킹이 일어나지 않는 정도를 표현하는 수치로, 옥탄가가 높은 휘발유일수록 노킹이 덜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론적으로는 옥탄가가 높은 휘발유가 점화시기를 앞당길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실제로는 옥탄가가 높은 휘발유를 넣어도 자동차의 점화시기는 달라지지 않는다. 엔진의 점화시기는 자동차의 개발과정에서 결정되는데, 국내 자동차 회사들은 이 과정에서 대개 옥탄가 91∼93의 보통 휘발유를 사용한다. 이때 결정된 점화시기는 엔진제어장치(ECU)에 기억되며, 이렇게 기억된 점화시기는 휘발유의 옥탄가가 다르다고 변하는 게 아니다.
엔진의 점화시기를 앞당기지 못하면 아무리 높은 옥탄가의 휘발유를 사용해도 엔진의 출력은 높아지지 않는다. 물론, 옥탄가가 높은 휘발유를 사용하면 엔진의 노후화나 가혹한 운전조건에서 유발되는 노킹을 감소시킬 수 있으므로 엔진의 내구성에는 도움이 될 수 있다. 또한 고급 휘발유에 첨가된 청정제는 연소실에 쌓인 카본 때로 인해 떨어진 엔진 출력을 일부나마 복원시킬 수 있다. 하지만 정유사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고급 휘발유 사용=엔진 출력 증강’이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한편 일부 수입 자동차 중에는 옥탄가 95 이상의 프리미엄 휘발유만을 사용하도록 설계된 것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