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생물학이다./에른스트 마이어 지음 최재천 옮김/496쪽 1만8000원 몸과마음
“생물학은 암기 과목이다!”
이런 엉뚱한 결론이 대학에서 생물학을 배울 때까지 내 머리 속에 늘 박혀 있었다. 늦바람이 들어 대학원에 와서 생물학을 다시 공부하게 되면서 이런 생각이 잘못된 편견임을 알게 되었지만, 생물학의 묘미를 맛보면 맛볼수록 생물학을 왜 그토록 재미없게 공부해야 했을까라는 아쉬움은 더 크게 남는다.
어쩌면 이유는 간단했는지도 모른다. 생물학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인 ‘진화’를 제대로 소개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화에 대한 이해 없이 생물학도가 된다는 말은 양자역학이나 상대성 이론을 염두에 두지 않고 물리학도가 된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수많은 생물학 교재 속에서 아직도 진화는 핵심 개념이라기 보다는 쉬어가는 코너에 등장하는 흥밋거리로 취급되기 일쑤이다.
진화의 개념을 중심으로 기존의 생물학 연구를 재구성했다는 측면에서, 진화생물학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마이어의 이 책은 진화론의 우아함에 매료되어 생물학에 뛰어든 이들에게 오아시스와도 같은 책이다. 저자는 생물학이 물리학 화학과 어떻게 다르며 어떤 의미에서 그들과 똑 같은 종류의 좋은 과학인지를 역설하면서 이 책을 시작한다.
진화론자답게 ‘오랜 진화의 역사를 거쳐 얻어진 유전 프로그램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생명현상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는 분자생물학, 생리학, 또는 발생생물학 등과 같이 생명 현상의 근접 원인을 다루는 분과도 결코 덜 중요하진 않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려는 바는 생물학에 세 가지 종류의 의미있는 물음 -무엇, 어떻게, 왜-이 존재하며 그 물음들에 대해 생물학의 여러 분과들이 서로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각자의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생물학 대가로서의 면모만이 이 책을 메우고 있진 않다. 생물학 이론의 변화가 위대한 과학사가 토마스 쿤의 주장처럼 그렇게 혁명적으로 일어나지는 않았다고 반박하는 부분에서, 그리고 기존의 과학철학이 마치 물리학만 과학인 것 마냥 물리학만을 주요 소재로 다뤄왔다고 비판하는 대목에서, 우리는 저자의 또 다른 권위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흔히 그렇듯, 대가가 자신의 걸어온 길을 회상하면서 한마디 툭 던지는 식의 역사와 철학이 아니다. 마이어는 생물학사와 생물철학 분야에도 뚜렷한 족적을 남긴 학자이다. 그리 두껍지 않은 책 한 권 속에 생물학, 생물학의 역사, 그리고 생물학의 철학이 함께 녹아들어 있다는 사실은 생물학 교재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너무도 명확히 가르쳐 준다.
이 책의 딱 한가지 아쉬운 점은 저자도 고백했듯이 분자생물학과 신경생물학에 대한 논의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대표역자는 이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멋진 후기를 선사했다. 생물학뿐만 아니라 생물학과 철학·역사의 만남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도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정말로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책이다.
장대익 서울대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