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송파구 가락동 비석거리공원. 이곳엔 조선시대 광주지역 지방관들의 공덕을 기리는 송덕비 11개가 모여있다. -사진제공 송파구청
조선시대 때 지방관이 부임해 선정(善政)을 베풀다 떠나면 백성들은 큰길가에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그 공적을 기리곤 했다. 그리고 비석이 하나 둘 늘어나면 그 곳을 ‘비석거리’라 불렀다. 비석이 서 있는 거리라는 의미에서 ‘비선거리’라 부르기도 했다.
서울 송파구 가락동 농수산물도매시장 맞은편 도로변에도 비석거리가 있다. 서울에서 유일한 비석거리로, 현재 ‘비석거리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490평의 이 공원엔 김여옥(金汝鈺·1596∼1662) 허징(許澄·1549∼?) 등 조선시대 때 경기 광주지역의 유수(留守·정2품)와 목사(牧使 정3품)를 지냈던 11명의 송덕비가 세워져 있다. 유수는 조선 지방관청인 부의 우두머리로, 다른 곳은 부윤(府尹)이라 불렀지만 한양 주변 요충지인 광주부 등 5곳에선 유수라고 칭했다. 가락동은 원래 광주에 속했다.
송덕비는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 애민(愛民)청덕선정비, 선정비, 청정비(淸政碑), 애민선정비 등의 이름을 갖고 있다. 맑고 깨끗한 덕(청덕)으로 백성을 사랑하고(애민) 올바르고 청렴하게 행정을 펼쳤던(청정·선정) 지방관들의 덕을 기린다는 뜻이다.
예로부터 이 거리는 나그네들의 쉼터로 활용됐다. 송덕비 주변에서 잠시 쉬어가면서 비석 주인공의 공덕을 되새겼던 것이다. 그러나 특별한 관리 없이 방치되면서 비석이 꽤 훼손됐고 비석거리도 황폐해졌다. 특히 이 곳이 시가지로 개발되면서 비석거리로서의 원형을 잃어가자 1988년 송파구는 이들 비석을 한데 모아 공원으로 조성했다.
공원 조성 당시 이름을 비석거리로 할 것인지 비선거리로 할 것인지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주민 설문조사 결과 “비석거리가 귀에 익숙하다”는 의견이 많아 비석거리공원으로 이름이 정해졌다.
백성들이 직접 세운 이들 11개의 송덕비와 달리 권력자들이 스스로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송덕비를 세운 경우도 있다. 사람들은 그런 송덕비 앞을 지날 때면 화풀이로 비석을 발로 찼고 여기에서 비석차기 민속놀이가 유래했다고 한다.
요즘에도 사람들은 비석거리공원을 찾아 옛 지방관들의 청렴과 애민 정신을 되새긴다. 그러나 일부 비석에선 영어 낙서가 눈에 띄기도 했다. 이를 본 송파구 관계자는 “선인들의 고결한 정신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이광표기자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