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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제작자 인터뷰]“체첸反軍 인질 사살 안했다”

입력 | 2002-11-01 18:03:00

인질극 당시 공연 중이던 뮤지컬 노르드오스트 제작자 게오르기 바실리예프. - 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


“아직도 긴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느낌이다.”

모스크바 문화회관(돔 쿨르트이) 인질극 당시 공연 중이던 뮤지컬 노르드오스트(북동풍)의 제작자인 게오르기 바실리예프(40)는 사건 발생 후 1주일 가까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모습이었다.

지난달 26일 벌어진 진압작전 과정에서 겨우 목숨은 구했지만 400만달러(약 49억원)를 들여 만든 무대는 폐허가 됐고 최초의 순수 러시아 뮤지컬을 브로드웨이 등 세계 무대에 올리려는 꿈도 깨졌다. 게다가 2명의 청소년 연기자를 포함해 오케스트라 단원과 기술자 등 18명을 잃었다.

그는 인질 대표로 인질범들과 협상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좀 진정됐나.

“현장에서 병원으로 실려 갔으나 사태를 수습하려고 곧 나왔다. 희생된 단원들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특히 아르세니 쿠릴렌코(13)와 크리스티나 쿠르바토바(14·여)의 부모 앞에서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특히 우리 단원 중 체첸 반군의 협조자가 있었다는 당국의 발표는 믿어지지 않는다.”

-반군이 먼저 인질을 사살하기 시작해 어쩔 수 없이 강제진압에 나섰다고 당국이 발표했는데….

“진실을 규명하는 일은 당국이 할 일이지만 내가 아는 한 반군은 인질을 단 한 사람도 사살하지 않았다. 내가 반군을 일부러 두둔할 이유가 없다. 나는 인질 중 유일하게 극장 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렇다면 인질극 동안 극장 밖으로 실려나온 2명의 사망자는 누구인가.

“인질극 직후 이를 미처 모르고 극장 안으로 들어오려다 반군이 오인 사살한 사람들로 그 중 젊은 여성은 술에 취한 상태였다.”

-인질극이 시작될 당시 상황은….

“3층 조명실에서 공연을 지휘하고 있는데 갑자기 총소리와 함께 그들이 뛰어 들어왔다.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1층 객석으로 내려갔다. 극장 내부를 잘 알기 때문에 비상구로 탈출할 수도 있었지만 극장 안에서 일어난 모든 일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에 반군에게 다가가 신분을 밝혔다. 반군은 나를 ‘극장장’이라고 부르며 인질 대표로 대우했다.”

-반군이 인질들을 심하게 다뤘나.

“위협사격을 하고 ‘죽여버리겠다’는 협박도 수없이 했다. 나중에는 이런 위협에 익숙해졌을 정도였다. 죽음에 대한 공포 등 정신적 고통이 더 컸다.”

-진압 작전 당시 상황은….

“대부분 잠들어 있었다. 나는 반군들과 얘기를 나누고 객석으로 돌아와 잠들려다 가스 냄새를 맡고 4∼5초 후 의식을 잃었다. 반군도 가스가 극장 내부로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을 것이다.”

-강제진압이 옳았다고 생각하는가.

“당시 반군과의 협상이 진행되면서 인질들이 조금씩 풀려나고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진압작전이 벌어졌다.”

-반군이나 인질들은 진압작전을 예상했는가.

“인질들은 물론 진압작전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날 밤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반군들은 극장 내부를 잘 몰랐고 진압 작전에 대한 대비가 너무 허술했다. 지하실이나 환풍구 등 진압부대가 들어올 구멍이 너무 많았다.”

-반군들이 당초 약속했던 외국인과 어린이 전원 석방이 끝내 이뤄지지 않은 이유는….

“반군의 인질 석방은 별다른 기준 없이 즉흥적이었다. 예를 들어 한 영국인이 계속 울면서 풀어달라고 호소하자 부인 아들과 함께 풀어줬다. 협상대표로 들어온 이오세프 코브존 하원의원이 ‘어린이와 여성을 풀어달라’고 요구하자 반군은 ‘당신들은 체첸에서 우리 아이와 여자들을 죽이지 않느냐’며 격한 반응을 보였다. 체첸에서는 12세 이상은 어른으로 보기 때문에 더 풀어줄 어린이 인질이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관련기사▼

- 러, 인질극 反軍 도운 혐의 40명 체포

-반군이 왜 당신의 공연을 인질극 대상으로 선택했다고 생각하는가.

“반군들은 내 공연이 순수 러시아 뮤지컬이라 비교적 외국인 관객이 적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러시아 정부와 경제계가 노르드오스트의 부활을 지원하겠다고 했는데….

“다시는 뮤지컬을 하고 싶지 않은 심정이었지만 지금은 반드시 다시 일어서야겠다고 마음을 바꿨다. 그러나 화려한 무대장치를 재현하고 희생된 단원들의 공백을 메우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다. 반군은 다름 아닌 러시아 문화계를 융단폭격했다.”


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 kimki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