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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삶]최용건/입엔 ´풀칠´ 해도 마음은 부자래요

입력 | 2002-11-01 18:42:00


‘나에게 신앙이 있다면 오로지 조촐한 삶 그뿐, 그 신앙의 아이콘은 산골짝의 희미한 오두막 불빛….’

강원도의 벽지,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로 이사온 뒤 머리맡에 써 붙여둔 나만의 기도문이다. 어느 날 새벽 시골소년이 쌀자루를 챙겨 무작정 상경하듯, 도회지를 떠나 연고도 없는 이 골짝으로 흘러 들어온 지도 이제 어언 6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공교롭게도 이 골짝에 이삿짐을 풀던 첫날 밤 산 너머 강릉 앞바다에 잠수함을 이용한 무장공비들의 침투사건이 벌어져, 인근 숲 속에는 군부대의 무장병력이 주둔해 있었다. 혹시 있을지도 모를 공비들의 습격에 대비해 군인들이 독립가옥인 우리 집 뒤에 참호를 파고 밤마다 보초를 서는 등 한달여 동안 긴장된 나날들을 보내게 될 때, 나는 아내와 함께 진동리 오지에서 살아가게 될 일이 은근히 걱정되기도 했다.

‘순수와 자유.’ 이는 나의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절체절명의 과제이다. 이 과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한시라도 삶을 부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평소 이 명제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삶의 방식이란 무엇일까 하고 고민했다. 끝없이 존재의 연결고리를 맺어 의식을 옥죄기만 하는 도회 구성원으로서의 삶을 포기하는 길 밖에는 달리 대안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규격´ 강요하는 도시생활 신물▼

나라고 하는 존재는 여러모로 보아 규격화된 도회에서 요구하는 정격부품이 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규격 외 부품’으로 살아가자니, 한마디로 주어진 하루하루가 갈등 천지의 생지옥처럼 느껴졌다.

어느 날 나는 아내와 상의한 끝에 자동차들이 승냥이처럼 갈기를 날리며 질주하는 도시와 정신병동과도 같은 아파트를 벗어나 세상에서 가장 선한 것들만이 모여 살고 있는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합의를 본 것이다. 지략이 아닌 지혜로만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참다운 환경을 찾아 미련없이 도회를 떠났다.

하지만 말이 농사지, 농사일로 잔뼈가 굵은 전업 농부들도 도산해 이농하는 처지에 뒤늦게 들어와, 그것도 농사에 대한 아무런 예비지식조차 없이 손댄 농사일이 제대로 될 리 만무했다.

예비자금으로 준비해온 돈들이 점차 바닥나기 시작했고, 마침내 농협에서 빚을 내어 쓸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는 농사짓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난국타개책으로 우리는 방 세 칸을 증축해 민박을 치기 시작했다.

아내는 민박을 관리하고, 나는 그림을 그려 판다. 그러니까 내 나이 지천명(知天命·50세)을 넘어, 시골 정착 6년 만에야 비로소 청년시절 머릿속에 그리던 순수성과 자유성을 보유한, 그러니까 가장 이상에 근접한 예술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산골서 6년…부러울 게 없어▼

민박운영 3년째…. 민박이란 지략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진솔한 지혜를 필요로 하는 인간거래 방식이기에 세상에 태어나 내가 경험한 어떠한 생존방식보다도 마음이 편하다.

이제는 적자도 면해 제법 수지균형을 이루는 안정된 전원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전원에서의 삶이란 더함도 덜함도 없어 남부러울 것 없는 상태다. 다소 표현이 궁색하지만 그저 입에다 풀칠할 수 있을 정도의 재화만을 지닐 수 있다면 성공한 삶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성취를 목표로 하는 도회의 삶과는 달리 자연에서의 삶이란 조화와 균형을 저울질하는 마음의 평화에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평화.’ 이는 아마 더함도 덜함도 없어 남부러울 것 없는 상태, 그래서 오만과 미움이 싹트지 않아 거리를 지나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도 까닭없이 손을 내밀어 인사를 나누고 싶어지는 상태쯤이 아닐까.

나의 가슴을 기쁨으로 가득 채워준 하늘과, 저녁노을이 아름다운 방태산 능선을 향해 두 손 모아 ‘사랑해요, 천지신명님…!’하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다.

▽최용건씨는 누구?▽

1949년 생. 서울대 미대 회화과를 졸업한 뒤 서울 대성고, 강원대, 공주교육대 등에서 교편을 잡다가 1996년 가을 부인과 함께 강원 인제군의 산간마을인 진동리에 정착했다. ‘하늘밭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며 농사도 짓고 민박도 치며 살고 있다. 진동리에서의 생활을 담은 에세이집으로 ‘흙에서 일구어낸 작은 행복’(열음사·1999년) ‘조금은 가난해도 좋다면’(푸른숲·2001년) 등을 펴냈다.

최용건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