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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TLOOK]이야기가 빠진 춤, 共感도 없다

입력 | 2002-11-04 17:57:00

◁ 80년대 중반까지 국내 춤 무대를 점유한 신무용 형식은 최승희의 춤(사진)으로부터 시작됐다./동아일보 자료사진▷ 지난 달 공연된 송수남의 ‘금빛달’. /사진제공 송수남


《오늘은 연극과 무용의 비평을 싣습니다. 지난 10월에는 유난히 신무용 공연들이 많았습니다. 김채현 교수는 요즘의 춤 창작물들이 너무 추상적이어서 공감대를 잘 형성하지 못한다고 판단하고 아주 중요한 문제를 하나 제기합니다. 이야기의 내재적 논리 없이 단편적 계기들을 나열하는 형식의 요즘 무용이 서술적 구성을 중심한 신무용에 비해 양식상의 후퇴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현대적 무용 만들기라는 시대적 명제 아래 ‘무용’보다 ‘현재성’에 몰두하는 춤 창작행위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현대적 연극 만들기 역시 연극인들의 숙제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의 전범이라 할 수 있는 독일의 공연 ‘신곡 1부: 지옥편’을 리뷰합니다. 연극을 19세기의 예술형식으로 보는 일반적 견해를 거부하며 연극이야말로 21세기형 예술형식임을 주장하는 슬로베니아의 젊은 연출가 토마스 판두르의 패기넘치는 공연입니다. 아르토의 잔혹극개념, 바그너의 음악극 개념, 브레히트의 서사극 개념, 동양연극의 양식미를 아우른 그의 연극은 연극만이 이룩할 수 있는 총체성을 성취하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빠진 춤, 共感도 없다(최승희류의 신무용을 생각하며)▼

춤도 역사를 갖는가? 춤을 진공 속의 아름다움으로 여긴다면 그렇게 반문할 법하다.

지난 10월에 우리 춤을 회고하는 행사가 잇달았다. 마치 춤에도 역사가 있고 역사의 물결과 함께 춤 역시 변동 중임을 역설한 듯하다. 최승희 탄생 90주년 기념 공연과 심포지움을 비롯, 국립발레단 창설 40주년, 송범 춤인생 60년, 송수남 춤인생 50년 기념 공연이 올려졌고 국립무용단도 올해 창설 40주년이다.

국립발레단은 예외지만 신무용 시대 양식이 고루 등장한 이들 공연에는 신무용의 역사적 위상과 관련 중요한 물음이 감춰져 있었다. 지금은 신무용 시대가 아니므로 그것은 마냥 기피되어 특정 시대의 문화 유산에 그쳐야 하는가. 최승희 시대부터 80년대 중반까지 춤 무대를 점유한 신무용 형식은 오늘날 찾아보기 어렵다. 같은 10월에 올린 송수남의 ‘금빛달’에서 서술조의 전개가 옅었던 사실은 신무용에 오래 동참한 세대도 신무용과 멀어지고 있음을 대변한다.

부채춤 유형의 예쁜 춤 그리고 무용극에서 흔했던 서술적 이야기체와 낭만적 감탄사, 재빠른 몰입, 매스게임식의 집단무, 산조풍의 온화한 흥취 등 신무용을 주도한 미적 요소들은 이제 창작의 중심 요소로 고려되지 않는다. 그에 비해 이즈음의 춤 창작물은 시대 조류를 반영하듯 연속적으로 펼쳐지는 기승전결식 구성을 거부하고 내용상 주된 몇몇 계기를 짚어가는 방식을 선호한다.

한국무용, 현대무용 등 어느 춤 장르를 막론하고 근래의 공연은 이처럼 신무용과 대조되고 있어 양식상의 발전으로 평가됨직하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되돌아보면, 지금의 춤들에 현저한 추상성이 춤의 공감대를 강화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이유에서 신무용적 발상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송범의 ‘도미부인’과 같은 무용극에서 흔히 설정된 자세한 인과관계가 지금 다시 말해주는 것은 구체적인 이야기가 추상적으로 압축될 때 추상성이 호소력을 갖는다는 점이다. 근래의 춤들에서 추상성은 포스트모던적인 분절된 구성 방식에 편승하여 단편적 계기들의 나열에 그치는 경향이 흔하다. 그리고 이번 행사 전부터 더러 소개된 최승희의 수많은 소품들에서는 춤 기교 속에 배인 내적 응집력으로 대작을 능가하는 사례들이 목격된다. 창작된 그리고 맛깔나는 소품 공연을 거의 접할 수 없는 현상황은 오히려 신무용에 비해 양식상의 후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닌지 자문하고 싶다.

80년대 중반이래 신무용을 정서적으로 기피해온 춤계의 흐름에서는 신무용을 객관화하고 발전적으로 극복하는 단계가 생략되었다. 신무용 작품들은 저마다 이야기에 기대는 한계 속에서도 원인과 결과를 중시하는 이야기의 내재적 논리 속에서 움직였다. 기량과 연출력의 향상에도 불구하고 근래의 춤들이 미진한 감을 주는 이유는 그러한 내재적 논리가 예술에서 시대를 초월한 기본 사항이라는 점을 간과하는 탓이 크다.

김채현 무용원 교수·무용평론가

▼정욕… 교만… 탐식… 파멸의 불 타오르다(토마스 판두르의 을 보고)▼

독일 탈리아극장의 ‘신곡 1부:지옥편’은 예술의 모든 장르가 통합된 총체극이다./동아일보 자료사진

인문학의 위기논쟁이 한창인 요즘 서구문학의 고전중의 고전인 단테의 ‘신곡’이 1부 지옥편과 2부 연옥과 천국편으로 나뉘어 공연되고 있다. 함부르크에 있는 독일의 명망 있는 탈리아 극장이 제작하고 슬로베니아의 젊은 연출가 토마스 판두르가 연출했다. 볼테르가 말했다던가. “이 작품은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고 칭찬을 받고 있으므로, 이 칭찬은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이다”라고. 프랑스 사상가의 비아냥 속에는 이 작품이 문학적 가치를 떠나서 그만큼 일반대중이 읽기에 힘들고 지루하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인간의 존재론적 고뇌들을 관념적인 시어로 토해낸 이 중세말기의 비연극적 고전문학을 도대체 연출자는 어떻게 행동화하고 연극화했을까.

관객이 입장하면 이미 무대 앞 좌우 끝에는 무대의상을 입은 악사들이 튜바와 첼로로 음울하고 둔중한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무대는 마치 2차 대전 때 학살당한 유태인들의 사진들, 아니면 발칸 반도의 내전으로 인종청소를 당한 희생자들의 사진들로 빽빽한 막으로 가려져 있다. 단테가 그린 지옥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연출가의 의도가 처음부터 분명했다. 그렇다. 우리가 고전을 태클하는 것은 그것이 갖는 현대적 의미, 보편적 시의성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무대 위로 갑자기 극장책임자와 제작책임자가 올라오더니, 단테 역을 맡은 토마스 슈마우저가 바로 전날 무릎 부상을 당해 움직일 수 없게 되어 부득이 그는 무대 중앙에 눕거나 앉아서 대사만 하고 행동은 다른 배우가 대역하도록 공연을 수정했다며 양해를 구하는 것이었다. 허탈했다. 공연은 그렇게 실망 가운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실망은 오래 가지 않았다. 무릎연골이 깨진 부상을 무릅쓰고 혼신을 다해 단테의 고뇌를 정서충만하게 표현하려는 이 젊은 배우의 치열한 예술혼이 오히려 감동스럽기도 했거니와 연극의 음악이, 무대가, 그리고 무엇보다 배우들의 필사적인 연기가 총체적으로 나를 흡입해버렸던 것이다. 맞다. 이 연극은 총체극이었다. 연극, 음악, 무용, 미술 등 예술의 모든 장르가 통합되고 종합된 총체극이었다. 사라예보 출신의 작곡가 고란 브레고비치는 종교성과 발칸의 지역성을 함께 느끼게 만드는 강렬한, 그리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듯한 집요한 음악을 썼다. 첼로, 튜바, 드럼만으로 장중한 심포니를 창조했으며, 느리고 단순한 멜로디의 성악은 곧 영혼의 노래였다. 악사들은 장면의 고통스러운 정서를 온몸으로 연주하면서 연극의 리듬을 조종했고 무대와 객석의 정서적 인식적 교류를 활성화했다. 여기에 연출자는 배우들이 물을 밟는 소리, 호흡마저도 음악화하면서 음악에 새 생명을 부여했다. 마리나 헬만의 무대디자인은 설치미술에 가까웠다. 거대한 3층의 철벽을 원통형으로 세우고 바닥에는 물이 가득한 죄의 늪을, 그리고 1층 후면의 철벽문을 열면 물길이 트여 베아트리체가 배를 타고 오거나 아니면 단테가 지옥에 대한 기억을 잊게 해줄 망각의 강인 ‘레테의 강’을 이룬다. 또 배우들을 구해줄 높은 사다리 두 개가 바닥에서 3층까지 가파르게 세워져 있다. 철벽이 우뚝 높은 만큼 지옥의 깊이는 깊다. 사다리가 가파른 만큼 구원의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90분 동안 내내 나를 긴장시키고 숨막히게 했던 것은 배우들이었다. 단테와 그의 스승인 베르길리우스가 지옥에서 만나는 저주받은 자들, 그러니까 성경이 정죄하는 정욕의 죄인들, 이교도들, 사기꾼들, 교만한 자들, 도둑들, 탐식가들이 때로는 늪지의 악어들처럼 물 위로 머리만 살짝 드러내놓고 떠다니면서, 때로는 벌거벗은 채 거꾸로 매달려 매맞으면서 가학자와 동성애적 성희를 벌이고, 때로는 고통을 전경화하는 일본의 부토무용수처럼 머리를 물 속에 처박고 거꾸로 서서, 때로는 민병이 되어 총을 들고 늪지의 바지선에 목숨을 간신히 의지하면서, 때로는 군무하듯 물 속에서 물장구로 시각적 리듬을 만들거나 행진을 하면서, 그리고 마지막엔 물 속에서 흡혈귀처럼 서로의 머리에서 피를 빨면서, 형제가 부자가 친구가 가족이 서로 적이 된 발칸의 지옥풍경을 필사적으로 육화해 냈던 것이다.

파리의 로댕 박물관에 가면 로댕이 ‘신곡’을 구상중인 단테를 모델로 만든 ‘생각하는 사람’의 청동조각이 정원 한 복판에 세워져 있다.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켜 인간의 고뇌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시인을 표현하고 있는데, 나는 같은 뜻에서 ‘신곡’의 연출자 토마스 판두르를 ‘생각하는 연출가’로 부르고 싶다. 아니면 지루하고 재미없는 고전을 흥미진진한 연극으로 재탄생시키며 위기의 인문학을 소생시킬 수 있는 ‘인문학전도사’라고 불러도 괜찮겠다.

김윤철 연극원 교수·연극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