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최근 미국에 대해 ‘불가침조약’ 체결을 주장하고 나섰다. 10월 초 제임스 켈리 미 대북 특사의 평양 방문시 북한이 스스로 밝힌 비밀 핵개발 계획을 무조건 폐기하라는 미국의 요구에 대해 북한은 10·25 외무성 담화를 통해 “미국이 먼저 불가침을 확약하면 미국의 안보상 우려를 해소할 용의가 있다”고 응수했다. 북한이 진정 핵문제 해결을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갈 데까지 가 보자는 허세(虛勢)인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불가침조약이란 국가간에 서로 무력 공격을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는 조약이다. 군사동맹이나 상호원조조약이 제3국과의 전쟁 가능성에 대비한 군사적 대비 조치라면, 불가침조약은 서로간의 전쟁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한 일종의 정치군사적 신뢰구축 조치라고 할 수 있다. 불가침조약은 흔히 조약 당사국의 정치적 군사적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됐고, 또 위반시 효과적인 제재 수단도 갖지 못한 것이 상례였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도 불가침조약은 어느 일방에 의해 파기되기가 일쑤였다. 모든 전쟁을 불법화하고 전쟁포기를 선언한 파리조약(1928), 독일-폴란드 불가침(1934), 독일-소련 불가침(1939), 일본-소련 불가침조약(1941) 등이 모두 파기돼 당사국간 전쟁으로 이어졌다.
▷남북한도 1992년 ‘남북 사이에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통해 상대방에게 무력을 사용하지 않으며, 분쟁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불가침 구역은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해 온 구역으로 한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북한은 불가침 약속 이후에도 해상, 수중 침투를 중단하지 않았고 우리의 북방한계선(NLL)을 불법 침범했던 것은 다반사였다. 불가침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1999년 연평해전이나 올 6월 서해교전 사태는 이런 사실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그런 북한이 지금 다시 미국에 대해 불가침조약 체결을 들고 나왔다. 미국에 의해 ‘악의 축’으로 규정된 북한이 핵무기 개발이라는 치명적인 약속 위반 문제는 그대로 놔둔 채 먼저 미국과의 불가침조약 체결을 요구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위협까지도 서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북한이 이 같은 억지를 부리는 배경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북한은 미국의 불가침 확약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10년 전 남북한간의 불가침 약속과 비핵화공동선언, 그리고 8년 전 북-미 제네바 핵합의 등 이미 맺은 합의사항을 존중하고 준수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될 것이다.
박용옥 객원논설위원 전 국방부 차관 yongokp@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