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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8월의 저편 167…1929년 11월 24일 (18)

입력 | 2002-11-06 17:57:00


그녀는 긴 목을 말처럼 소리없이 기울이고 머리를 땋고 있다.

배는 달처럼 불렀는데 댕기머리를 하고 있다니, 머리가 어떻게 된 걸 거라고 언니가 그랍디다.

뭐라?

그 여자 말입니다.

…어어.

이 동네에서 그 여자 편이 어디 하나 있겠습니까.

어어.

아버님은 아무 말 안 합니까?

무슨 말을 하겠나.

당신은 바람 피우지 말아예.

그녀는 입에 문 빨간 댕기로 머리끝을 묶고서 내 얼굴을 봤지만,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난생 처음 당신이라 불린 것도, 입안에 그녀의 체취가 남아 있는 것도 왠지 쑥쓰럽다고 할까, 선을 넘어버렸으니 이제는 되돌이킬 수 없다는 마음이 커졌기 때문이다.

옷을 입자, 죽어라 헤엄치고 강에서 나왔을 때처럼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앞으로 나는 타인의 인생까지 책임지며 살아야 한다, 이 여자의 인생과, 이 여자가 낳을 아이의 인생까지 짊어지고.

우리는 여느 때처럼 강가를 걸었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잊었지만 평소처럼 농담을 주고받으며 걸었다. 그녀가 평소보다 거리낌없이 웃으면서 내 옆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땀에 젖은 그녀의 손이 내 손을 꼭 잡았다.

여자가 걷고 있다. 둥그런 배에 두 손을 대고 물 속을 걷듯 천천히, 삼나무 집 여자였다. 본처가 있는 집에서 10분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정을 통하여 애를 갖는 대담한 짓거리를 했음에도 여자의 얼굴은 하얀 꽃처럼 무상하고 아름다웠다.

저 여자의 뱃속에는 나의 남동생이나 여동생이 들어 있다, 그리고 나 역시 이 여자에게 내 씨를 심었을지도 모른다, 고 생각했을 때 내 안에서 무언가가 튀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혼전에 그녀를 범한 것은 성욕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눈을 피해 하루가 멀다 하고 첩의 집을 드나든다는 것을 알면서도 집에서는 화를 풀 수 없었다. 출구가 봉쇄된 분노가 내 안에서 뜨겁게 굳어 있었다. 나는 그 분노를 그녀 안에다 쏟아내 녹여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여자의 얼굴이 점점 다가오고, 목덜미가 뜨거워지면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어졌다. 지나가는 순간, 삼나무집 여자가 나와 눈을 마주치면서 미소지었다.

글 유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