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본을 6번 고쳐쓰다 영화가 엉망이 된 ‘어느날 그녀에게 생긴 일’의 주연배우 안젤리나 졸리./동아일보 자료사진
기세등등하게 협박했지만 영화 ‘플레이어’에서 죽는 사람은 시나리오 작가였다. 모든 영화는 누군가가 아이디어를 글로 옮기는 것에서 시작된다. 시나리오는 감독과 배우, 제작 스태프에게 갈 길을 알려주는 지도다. 그러나 정작 그 지도를 만드는 작가들은 할리우드에서 ‘천대’받는 그룹 가운데 하나다.
# 1: 고치고 또 고치고…
지난달 국내 개봉된 ‘어느날 그녀에게 생긴 일’의 작가 존 스콧 셰퍼드가 원래 쓴 시나리오는 ‘아메리칸 뷰티’처럼 풍자적이고 어두운 이야기였다. 그러나 영화사는 주인공을 ‘호감 가는 캐릭터’로 만들기 위해 대본을 6번 고쳐 쓰게 했고, 주연 배우 안젤리나 졸리는 TV 리포터인 자기 캐릭터가 마릴린 먼로를 닮은 금발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영화는 맥빠진 로맨틱 코미디로 바뀌고 희한한 여주인공이 탄생했다.
‘고인돌 가족 플린스톤’같은 영화가 작가를 계속 갈아 치우며 대본을 35번이나 고쳐 쓴 것 처럼, 작가들에 대한 영화사의 대본 수정 요구는 끝이 없다. 신참 작가들은 초고를 영화사에 공식적으로 전달하기 전, 공짜로 여러 버전의 대본을 써야 한다는 것이 거의 불문률이 됐다.
예전에는 A급 작가가 대본을 마무리하는 ‘시나리오 닥터링(Doctoring)’이 끝이었지만, 요즘은 그 ‘닥터’의 손을 거친 대본에도 영화사의 추가 수정이나 윤색 요구가 이어진다.
# 2: 도대체 누구의 작품?
‘내일을 향해 쏴라’의 작가 윌리암 골드맨처럼 익명 작업을 선호하는 유명한 일부 ‘닥터’를 제외하고, 작가들 사이에서는 ‘창작권’을 둘러싼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고질라’의 경우 두 젊은 작가가 처음 착안한 이야기는 고질라와 익룡 그리펀의 싸움이었으나 다른 작가가 손을 대면서 그리펀이 제거되고 고질라의 단독 주연으로 바뀌었다. 이럴 때 ‘Written by’ 크레딧에 대한 분쟁이 생기면 작가 조합이 중재에 나선다.
이처럼 ‘다듬기’가 심해지는 것은 영화의 상업적 성격이 강화되기 때문이다. 국경을 넘어 어필할 수 있고 상업적으로 안전한 스토리를 찾다보니 과거의 명 대사나 의미심장한 뉘앙스를 만들어내는 작가의 독창성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 것.
그러나 거의 10년 간 다듬은 ‘런어웨이 브라이드’의 최종 시나리오가 초고를 개악했다는 평을 듣듯, 기나긴 퇴고 과정에서 영화사 경영진은 초고의 가장 큰 매력인 독창성을 희석해버리는 경우가 잦다.
이 과정에 질린 시나리오 작가들이 요즘 몰려가는 피난처는 TV다. ‘마감시간’도 분명하거니와 케이블 채널 HBO의 인기 시리즈 ‘식스 피트 언더’를 총감독하는 시나리오 작가 앨런 볼 (영화 ‘아메리칸 뷰티’집필)처럼, 히트하면 작가가 제작의 전 과정을 장악하는 ‘생산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