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차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설이 부쩍 나도는 우방궈(吳邦國) 공업담당 부총리는 집권 상하이방(上海幇)의 ‘넘버 투 맨’이다.
장쩌민(江澤民) 총서기의 ‘고문’이 왕다오한(汪道涵) 전 상하이 시장이고, 우방궈는 ‘조수’이며, 쩡칭훙(曾慶紅) 정치국 후보위원은 ‘비서’라는 비유는 상하이방의 내부 역학관계를 잘 설명한다.
그는 또 주룽지(朱鎔基) 총리, 후진타오(胡錦濤) 국가부주석, 황쥐(黃菊) 전 상하이시 서기 등과 함께 정치국과 국무원 등에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칭화(淸華)대 출신의 ‘칭화방’에도 속한다.
우방궈는 줄곧 총리후보로 꼽혀 왔으면서도 근래에는 경쟁자인 원자바오(溫家寶) 농업담당 부총리에게 밀리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가 담당하고 있는 국유기업 개혁이 지지부진한 탓도 있지만 지역과 학연에 따른 역차별 때문이라는 시각이 더 많다.
칭화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한 그는 27년 동안 줄곧 상하이에서 일했다. 상하이 출신으로 승진 가도를 달렸던 사람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우방궈도 ‘상하이의 다거(大哥·대형)’로 통하는 천궈둥(陳國棟)의 눈에 들어 요직에 발탁됐다. 1980년대 초반 상하이시 서기였던 천이 시 중급간부였던 우방궈의 깔끔한 업무능력과 겸손한 태도를 높이 사 상하이시 부서기로 임명했던 것.
그는 시 부서기 재임 중 상하이 시장으로 부임한 장쩌민과 돈독한 인연을 맺으면서 상하이방의 핵심 인물로 자리잡게 된다. 이어 상하이시 서기가 된 주룽지가 1991년 6월 국무원 부총리로 승진해 감에 따라 후임 시 서기로 등용됐고, 92년 정치국에 진입하면서 국가지도자 반열에 올랐다.
주룽지가 총리가 되면서 부총리로 임명된 우방궈는 중국 경제의 최대 난제인 국유기업 개혁이라는 중대한 업무를 맡았다. 오랫동안 기업 및 기술 관련 업무에 종사해 계획경제 체제의 폐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2000년 1월에는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위해 유럽연합(EU)과 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또 한국이 최초로 상용화를 실현한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사업의 중국 진출에도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우방궈는 중국에서 가장 낙후된 지방의 하나인 안후이(安徽)성 페이둥(肥東)에서 태어났지만 베이징(北京)에서 자랐다. 부친이 중국인민해방군 측량학원 고급교관이어서 성장환경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베이징 13중학을 졸업한 그는 덩샤오핑(鄧小平)의 아들 등푸팡(鄧僕方)의 2년 선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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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방궈는 중국 정치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서민적 풍모를 잃지 않는 지도자로 유명하다.
상하이 중견간부 시절 3평 남짓한 좁은 집에서 다섯 식구가 생활했고, 여름철 밤에는 더위를 피하기 위해 한두 시간 길가 벤치에서 잠을 자다 돌아갔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다. 움푹 들어간 뺨에 수척한 인상의 노동자풍인 우방궈는 부총리로서 지방을 시찰할 때도 항상 수수한 잠바 차림이어서 거부감을 주지 않는다.
베이징〓황유성특파원 yshwang@donga.com
▼우방궈는…▼
△1941년 7월 출생. 본적 안후이(安輝)성 페이둥(肥東)현
△1967년 칭화(淸華)대 무선전전자(電電子) 학과 졸업, 1964년 중국 공산당 입당
△1967∼78년 상하이(上海) 전자관(管)
제3공장 노동자, 과장, 부공장장, 공장장
△1978∼79년 상하이시 전자부품공사 부사장
△1981∼83년 상하이시 계량기 전신(電訊)
공업국 부서기
△1982년 9월 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제12차 전국대표대회)
△1983∼85년 상하이시 당 위원회 상무위원 겸 시정부 과기(科技)공작 당 위원회 서기
△1985∼91년 상하이시 부서기
△1991∼94년 상하이시 서기
△1992년 10월 정치국원(제14차 전국대표대회)
△1994년 9월 중앙서기처 서기 겸임
(14기 4중전회)
△1995년 3월 국무원 부총리
(제8기 전국인민대표대회 3차 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