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24일 러시아 정부측 협상가들이 모스크바 문화회관으로 접근
“복면을 한 인질범은 자폭하지 않는다. 영웅심리도 없다. 얼굴을 가리는 것은 살고 싶다는 증거이다. 조기 진압 결정은 경솔했다.”
테러 관련학 전문가인 덕성여대 정치학과 박원탁 교수는 지난달 모스크바에서 발생한 체첸 반군의 인질 테러에 대한 러시아 특수부대의 강경 진압을 이렇게 평가했다. 협상 진행 도중 실시된 진압 작전으로 최소 168명의 희생자(인질 118명, 인질범 50명)가 나왔다. 박 교수는 88년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란 말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탈주범 지강헌 일당과 불과 2m 거리에서 협상을 벌인 네고시에이터(negotiator·협상가)였다.
교도소 내에서 동료 수감자를 인질로 삼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인질 범죄에는 때와 장소가 따로 없다.
인질범의 카운터파트인 경찰의 협상은 어떤 단계와 세부 전술에 의해 이뤄질까. 인질범의 일거수 일투족에선 어떤 심리를 읽어낼까.
국내에서는 국립경찰대 산하 수사보안연수소에서 경찰관을 대상으로 ‘인질협상 과정’을 교육한다. 작년 9·11 테러 이후 국내에서도 대 테러 협상 및 진압에 대한 교육·훈련이 강화됐다. 그러나 구체적 매뉴얼은 대통령 훈령으로 극비사항이다. 인질 사건을 성공적으로 해결한 일선 경찰서와 경찰청 대테러 부대, 테러문제 전문가 등을 통해 제한적으로 협상기법과 현장 노하우에 접근할 수 있었다.
●쉽게 흥분 B형 협상엔 부적당
“5000만원을 1시까지 가져와라.”(범인) “3000만원을 몇 시까지 가져오라고?”(협상가) “1시까지라고. 3000만원이 아니고 5000만원이다. 귀 먹었냐?”(범인) “아, 미안하다. 그래. 1시까지, 5000만원.”(협상가)
범인의 말을 반복하고 일부를 알아듣지 못하는 체하는 것은 ‘경청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범인에게 전달하면서도 시간을 끈다. 시간을 끌수록 범인이 △스스로를 반추하게 되고 △집중력과 체력이 떨어지며 △인질과의 인간적 유대가 형성될 공산이 커진다. 협상이 실패하더라도 효과적인 진압 여건이 조성된다.
인질범의 요구에 대한 즉답은 피한다. “정확히 1시간 뒤까지 답변을 주겠다”는 식으로 범인의 희망을 깨뜨리지 않으면서 지연한다. 인질범의 관심사는 요구사항(대부분 돈)이지 인질이 아니다. 전화 협상의 경우 인질범을 흥분시키면서도 요구사항에 대한 집착을 강화시켜 인질을 해치지 못하도록 유도하는 방법도 효과가 있다.
“1000만원을 입금시키라고 했는데, 왜 200만원만 입금시켰나? 나를 뭘로 보는 거냐.”(범인) “미안하다. 돈을 구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진짜로 돈을 입금하지 않았느냐?”(경찰의 지도를 받는 인질의 가족)
체력과 지구력은 협상가의 기본 조건이다. 사건 발생시 관할 경찰서장은 △술을 좋아하지 않아 협상이 며칠간 지속되더라도 술 생각을 하지 않고 △고혈압 및 당뇨증상이 없는 수사과 형사 중 적임자를 협상자로 선임하는 경우가 많다. 쉽게 흥분하거나 슬퍼하는 경향의 B형 혈액형은 가급적 피한다. 테러리스트들은 고집이 센 O형이 많다.
해외의 조직적인 테러리스트들은 3, 5, 7명 등 홀수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배신한 동료에 대한 즉결처분권을 갖는 팀장 1명을 여성으로 하고 남성조직원은 짝수로 하기 때문이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초심(初心)이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는 판단에 따른 것.
서울의 한 경찰서 A경위는 96년 전화로 가족에게 요구사항을 알려온 유괴범의 불안감과 호기심을 동시에 자극하는 방법을 썼다. 그는 처음부터 가족을 대신해 전화를 받았다. “나는 서울 ××경찰서 소속 ×××다. 당신과 대화하고 싶다”(A경위) “재수 없는 놈. 끊는다.”(범인) A경위와 범인의 이러한 공방은 이틀 간 여덟 번이나 계속됐다. 사흘째 되던 날 아침부터 A경위는 범인의 전화를 일절 받지 않았다. “여보세요.”(가족) “어, A형사 어디 있어?”(범인) “이젠 전화 안 받으시겠답니다.”(가족) “무슨 소리야. 그놈 무슨 짓 하는 거야. 1시간 내로 전화할 테니까, 대령시켜 놔.”(범인) 범인은 A경위를 대화 상대로 인정, 7일간의 끈질긴 대화 끝에 자수했다.
●주고 받아라 (Give and Take)
협상 시간이 늘어나면 범인은 음식, 물, 애인과의 대면, 형량 감면 등을 추가 요구한다. 절대로 ‘노(no)’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 협상의 기본이지만, ‘공짜’는 없다는 것을 인식시킨다. “빵과 우유를 달라.”(범인) “좋다. 빵과 우유를 주는 대신 임산부와 아이들은 풀어줘라. 내 얼굴을 세워줘야 재량권을 더 발휘할 것 아닌가.”(협상가) 음식은 최고급으로 제공한다. 비싸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범인은 ‘지금 죽으면 이런 음식도 더 이상 먹지 못하겠지…’하는 아쉬움과 함께 생에 대한 애착을 갖는다.
그러나 범인 요구에 앞서 음식을 제안하거나 과잉 친절을 베푸는 것은 금물이다.
“배 고픈가? 목 마른가? 음식과 음료를 넣어주겠다.”(협상가) “음식에 독약 넣었지? 콜라에 수면제 탔지?”(범인) 범인은 순간적으로 ‘음모를 꾸미는 나쁜 자(경찰)들을 응징하리라’하고 착각하는 ‘정의의 사도(師徒) 콤플렉스’에 빠져 인질을 해친다. 협상가는 단 한 번의 거짓말을 위해 아흔 아홉 번을 정직하게 말해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인질범은 협상자의 행동을 두고 도덕적인 판단(‘저 자가 정직한가’)을 내린다.
협상가는 인질범과 같은 환경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며 신뢰를 얻는다. 가급적 제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당신을 이해한다”는 말을 빈번하게 한다. 목마른 범인 앞에서 물이나 음료수를 마시는 것도 범인의 상대적 박탈감을 자극하는 금기사항이다. 높임말을 쓰는 것이 기본이지만 범인이 아주 어린 경우 의도적으로 반말을 써 ‘부모-자식’ 같은 관계 설정을 무의식에 심는다. ‘복종’을 유도하는 것.
인질범과는 5∼10m 거리를 유지한다. 표정과 말을 효과적으로 전달해 대화가 끊기지 않는 거리.
●애인보다 어머니 대면케 하라
동국대 경찰학과 이상현 교수(국가 대테러 협상위원)는 “범인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간파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했다. △팔짱을 끼고 말하거나 △“내가 거짓말한다면 내 마누라를 당신에게 주겠다” “손에 장을 지지겠다”는 식의 단정적 표현을 하면 거짓일 확률이 높다. 반면 턱을 안으로 집어넣거나 눈을 감고 말하는 경우는 진실일 경우가 많다. 욕설이 급작스레 줄거나 “내 말대로 하면 인질에 절대로 손대지 않겠다”고 말하는 경우 협상은 절반의 성공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욕을 한다면 협상을 포기했을 가능성이 높다.
죽기를 각오하는 인질범은 많으나, 죽고자 하는 인질범은 적다. 종교나 정치적 이유를 둘러싼 자살 테러의 경우도 전문가들은 ‘마약 투약 상태에서 자폭했을 가능성’을 점친다. 지난 해 9·11 세계무역센터 테러범들 중에도 항공기 조종실을 점유한 ‘팀장’ 외에는 자신이 자살 특공대원임을 아무도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경찰청 경비과 박노현 대테러계장은 “인질범의 심리상태를 영적(靈的) 제로(zero) 상태가 되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내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깨우침을 갖도록 일종의 ‘심리 조종’을 하는 것. 어머니를 인질범과 대면시키는 것도 효과적이다. 국내 범죄자들은 효(孝)의식을 지닌 경우가 많다. 사형수도 최후 진술 중 “부모님께 죄송하다”는 말을 가장 많이 한다. 그러나 아버지와의 만남은 적절하지 않다. 범죄자 중 다수는 ‘내가 이렇게 된 것은 아버지의 학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애인과의 대면도 협상에 치명타다. 범인이 애인에게는 극도의 수치심과 자존심이 상함을 느낀다. 모성(母性)은 무조건적이지만, 사랑은 조건적이다. 인질범이 애인과의 대면을 요구할 때에는 “급성 맹장염에 걸려 지금 병원에 있다. 내일이면 올 수 있다”면서 비켜나간다.
협상가는 가급적 인질범 보다 1m가량 높은 위치를 확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범인은 낮은 곳에 있는 협상가를 무시하고 우월감을 느낀다.
●희생자가 나면 진압착수
인질범이 인질 중 최소 1명을 살해하는 순간부터 ‘협상 포기-진압 실시’로 국면이 전환되기 시작한다.
국립경찰대 경찰학과 한종욱 교수는 적절한 진압 시기를 다음 4가지 시점이 일치하는 순간으로 본다. ①범인이 자신의 신변에 대해 최대한 안심(형량 감면 등)하고 ②요구조건(돈 또는 탈출)의 실현에 대해 희망과 기대를 가지며 ③범인이 인질을 살해할 위기 정도가 심해지고 ④범인의 체력과 정신력이 저하된 순간이다. 인질범이 요구하는 조건(탈출, 돈 등)에 대해 경찰이 심사숙고 끝에 결정한 듯한 긍정적인 응답을 보낸 직후(범인의 긴장이 풀리기 시작하는 순간)가 진압 시작 시점이다.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