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에 자유무역협정(FTA) ‘태풍’이 불어닥칠 조짐이 뚜렷해지고 있다.
유럽연합(EU)이나 북미 등과 비교하면 그동안 아시아는 ‘FTA 무풍(無風)지대’에 가까웠다. 하지만 최근 중국과 일본이 동남아국가연합(ASEAN)과 잇따라 FTA를 체결하기로 합의하면서 각국간 FTA 논의가 급물살을 탈 전망이다. 중국과 일본은 FTA를 둘러싸고 아시아에서 ‘맹주’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기(氣)싸움’ 양상도 보이고 있다.
동북아와 동남아를 포함한 동아시아에 대한 우리나라의 수출액은 전체의 약 30%를 넘는다. 이 때문에 한국정부는 새로운 변화에 어떻게 대응할지 고심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합종연횡〓중국과 ASEAN은 4일 2010∼2015년까지 FTA를 맺기로 합의했다. 당장 내년 초부터 관세인하 협상을 시작해 2004년 중반까지 매듭지은 후 2007년부터 농산물을 포함한 600개 품목의 관세를 없애기로 했다. ASEAN 6개 선발 회원국은 2010년, 나머지 4개국은 2015년까지 FTA를 매듭짓는 등 구체적인 일정도 나왔다. 일본도 5일 ASEAN과 ‘경제동반자관계(EPA)’ 구축을 다짐하는 공동선언문에 서명하고 10년 안에 FTA를 체결키로 했다.
중국 주룽지(朱鎔基) 총리는 최근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린 ‘ASEAN+3(한국 중국 일본)’ 회의에서 “한중일 FTA를 맺자”고 제안했다. 일본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는 “일본과 한국이 먼저 FTA를 맺은 뒤 중국의 참여를 고려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석수(金碩洙) 총리를 포함한 3국 총리는 “내년도 3국 공동 연구과제로 ‘한중일 FTA의 경제적 효과’를 채택하기로 합의했다.
1998년 브루나이에서 열린 ‘ASEAN+3 정상회의’에서는 동아시아 전체를 하나로 묶는 ‘동아시아 자유무역지대(EAFTA)’ 창설을 중장기적 과제에 포함시켰다. 이런 흐름을 감안하면 당장 쉽지는 않겠지만 장기적으로 EU나 북미자유무역지대와 같은 거대 경제블록이 아시아에서 나타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각국의 의도와 전략〓LG경제연구원 이지평(李地平) 연구위원은 “중국은 경제가 급성장하는 데다 농업부문에서도 부담이 없어 아시아 전역에 FTA를 확산시키려 하고 있다”며 “중국의 행보는 경제적 실리 못지 않게 아시아에서 주도권을 잡아 미국에 맞서겠다는 의도도 엿보인다”고 분석했다.
대한무역협회 무역연구소 정재화(鄭宰和) FTA 팀장은 “중국은 동남아 경제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화교네트워크에 FTA라는 제도적인 기반까지 마련해 이곳에서 터를 닦아온 일본과 세력다툼을 벌이는 정치적 측면도 생각하는 듯하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일본 언론은 중국과 ASEAN간 FTA 추진 합의가 나왔을 때 ‘기는 일본, 뛰는 중국’식으로 보도하면서 중국이 아시아 지역의 경제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의도로 풀이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최낙균(崔洛均) 무역투자정책실장은 “일본은 중국과 ASEAN이 급속히 가까워지면 제품 수출 시장이 축소되는 것은 물론 ‘생산기지 동남아’를 중국에 뺏길 것이라는 위기감도 갖고 있다”고 풀이했다.
ASEAN은 중국과의 FTA를 통해 상품 수출 증가 못지 않게 중국으로 가려는 외국자본을 유치하는 것에 큰 비중을 두고 있는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한국정부 대응은?〓김석수 총리는 프놈펜 회의에서 “ASEAN과 FTA 논의를 시작하면 농수산물 수입증가로 반발이 예상된다”며 “중장기적으로 ASEAN과 FTA를 체결한다는 원칙 아래 단계적, 점진적으로 추진한다는 방침”이라고 말했다.
황두연(黃斗淵) 통상교섭본부장은 7일 “ASEAN 국가 중 농업부문에 부담이 적고 충격이 적은 싱가포르를 칠레 다음의 FTA 파트너로 삼아 FTA를 추진하기로 의견이 모아졌다”며 “그러나 ASEAN 전체와 협상을 진행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다만 올 3월부터 가동중인 ‘한일 산관학(産官學) 공동연구회’는 일정대로 진행시킨다는 방침이어서 한국도 내년부터는 동시다발적으로 FTA 협상을 진행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또 외교부는 KIEP에 다양한 ‘FTA 짝짓기’ 방법에 대한 장단점을 비교하는 용역을 의뢰해 놓고 있다.
공동연구회 한국측 수석대표인 외교통상부 조현(趙顯) 심의관은 “일본과는 농업부문도 한국이 유리한 입장이어서 농업을 포함한 광범위한 분야의 자유화를 추진하되 중국을 적대시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일부 전문가는 “한국은 가장 민감한 농업부문에서 일본과는 유리하고 중국과는 불리하게 때문에 개방에 따른 효과가 상쇄되는 것을 감안, 한중일 3국간 FTA를 논의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분석한다.
구자룡기자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