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익단체들의 움직임이 어느 때보다 분주해지고 있다. 대선 후보를 초청해 각종 토론회를 개최하는 것은 물론 대규모 집회와 시위를 통해 정치권을 압박할 움직임이다.
이 같은 후보초청 토론회와 집회는 이익단체의 의견을 표출할 수 있는 ‘권리’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익단체들이 통상적인 정책결정 과정을 무시한 채 선거기간에 집중적인 ‘세(勢) 과시’에 나서면서 부작용도 적지 않다.
▽잇따르는 집회와 행사〓민주노총은 10일 서울 대학로에서 5만여명이 참석하는 ‘노동법 개악안 폐지 전국노동자 대회’를 열 계획이다. 전국농업인총연합회는 13일 서울 여의도 한강시민공원에서 농민 5만여명이 참여하는 WTO 반대 전국농민대회를 개최키로 했다.
또 15일에는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가 전국교육자대회를, 18일에는 전국유아미술학원연합회가 유아교육비 평등지원 촉구 대회를 갖는 등 11월에만 전국에서 200개의 크고 작은 집회가 ‘예약’되어 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지난달 31일 열려던 대선후보 초청 토론회가 후보들의 잇따른 불참으로 무산되자 다시 각 정당에 개별 토론회 참석을 요청했다. 11월 중 토론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약사회는 이달 23일 부산에서 열리는 ‘여약사 대회’에 대선후보들을 초청했다. 의사협회는 이회창 후보 초청 토론회를 열기로 하고 현재 한나라당과 일정을 조정 중이다. 이달 5일에는 민주노총이 근로기준법 개정안에 반발, 8만여명이 참가하는 시한부 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전국공무원노조도 4, 5일 전국적으로 2만여명이 연가를 낸 뒤 상경해 집회를 하려 했으나 경찰의 원천봉쇄로 대회를 열지 못했다.
▽시기에 문제없나〓대선을 앞두고 후보 초청행사와 시위, 집회가 봇물을 이루는 것은 선거과정에 자신들의 요구를 십분 반영할 수 있는 최적의 시기라고 판단하기 때문. 선거가 막바지에 이르면서 각 후보들은 표심(票心)을 의식한 공약을 내세울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전교조 한만중(韓萬中) 정책교섭국장은 “선거를 앞두고 후보들의 공약이 형성될 때 단체의 요구와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해야만 공약에도 반영되고 나아가 정책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압력성 시위나 일방적인 토론회는 결국 지켜지지 않는 공약(空約)을 만들어내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의 이내영(李來榮) 교수는 “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후보들이 이 같은 (이익단체의) 요구에 약해지다 보면 지키지 못할 공약을 남발할 수도 있다”며 “이 때문에 당선 후에는 ‘왜 공약사항을 지키지 않느냐’는 민원이 끊이지 않는 등 악순환이 반복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또 “이익단체가 선거를 앞두고 압력성 행사를 하는 것은 자연스럽다”며 “그러나 명분 없는 대규모 시위를 벌이는 것은 사회 전반에 불안심리를 자극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익단체들의 쟁점과 갈등〓이익단체간 갈등은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더욱 첨예해지고 있다.
노사정간 논란의 핵심은 정부가 마련한 ‘주5일 근무제 법안’. 노동단체는 정부안이 근로자의 임금을 삭감할 여지를 주고, 단체협약을 무용지물로 만든다며 극렬하게 반대하고 있다. 이 법안은 이번 정기국회 통과가 사실상 무산된 상태여서 일단 쟁점에서 벗어났지만 노동단체들은 내년도 입법을 겨냥해 이른바 ‘투쟁수위’를 낮추지 않고 있다.
교육계는 교사 정년을 65세로 환원하는 것과 수석 교사제 신설 등이 최대의 현안.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 이명균(李明均) 선임연구원은 “교사 정년이 99년 62세로 단축되면서 교단에 혼란과 갖가지 부작용을 초래했다”고 말했다. 따라서 이번 대선을 통해 정년을 변경하려는 압박이 심할 수밖에 없다고 그는 지적했다.
의약계의 쟁점은 건강보험제도. 대한의사협회는 현 제도가 환자들에게 적정 수준의 진료를 제공하지 못하고 의사들도 소신껏 진료할 수 없다며 전면 재검토를 주장하고 있다. 반면 대한약사회측은 “의사회는 진료 수가 유지 또는 인상에만 관심이 있다”며 “건강보험 재정의 건전화와 의약분업의 정착이 현시점에서 가장 긴요하다”고 말했다.
김성규기자 kimsk@donga.com
▼97년 대선때는▼
각종 이익단체들의 민원과 압력성 행사는 선거 때마다 되풀이됐다.
97년 대선 때는 당 소속 자치단체 인사들의 민원 요구가 가장 많았다.
대선 직후 바로 지방자치제 선거를 치러야 할 단체장 예비후보들이 당선에 필요한 ‘한 건’을 남길 절호의 기회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분석.
당시 무소속의 신구범(愼久範) 제주지사가 제주종합개발사업 국고보조사업 지역현안사업 등에 지원을 요청했던 것도 이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또 충남(백제권 개발사업), 경남(김해 경전철사업, 진주광역권 개발), 전남(2010년 해양엑스포유치) 등 각 도가 대대적인 숙원 사업 해결에 나섰다.
전국경제인연합회도 ‘새정부 정책과제’를 발표하고 정부기구 축소와 금리 토지 노동시장 등에 대한 규제 철폐를 요구했다. 전국농민회총연맹 등 이익단체들도 잇따라 대선 후보를 겨냥한 집회와 행사를 열었다.
이 때문에 여의도 당시 신한국당 당사와 국민회의 당사 앞에서는 거의 매일같이 집단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압력성 행사와 요구는 거의 대부분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나라당의 정병국(鄭柄國) 부실장은 “이익단체들이 자체행사에 대선 후보를 초청하는 것은 단체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이 크다”며 “정작 자신들의 요구를 선거 본부에 이해시키려는 실질적인 노력은 미흡하다”고 말했다.
대선 후보 입장에서도 표를 의식해 행사에 참석은 하지만 일방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전달할 뿐이어서 일회성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김성규기자 kimsk@donga.com
이진구기자 sys120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