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태산 정상의 ‘공자묘(孔子廟)’에 올라 공자가 내려다봤던 세상을 굽어 보고 싶어 한다./김형찬기자
중국을 대표하는 다섯 산(五岳) 중 동쪽 산(東岳)에 해당하는 산둥(山東)성의 태산(泰山)은 오악 중에서도 으뜸임을 자랑한다.
태산에 오른 사람들은 ‘오악독존(五岳獨尊·오악 중 최고)’이라고 커다랗게 새겨놓은 바위 앞에서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나도 태산에 올랐다.”
그 증거를 남기고 싶은 모양이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랐을지라도. 그 규모로 보나 높이로 보나 그 모습은 최고가 아님에도 태산은 비교를 허락지 않는(獨尊) ‘으뜸’이다.
비교할 만한 것이 단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공자(孔子·BC 551∼BC 479)다.
‘공자는 성인 중의 태산이고 태산은 산악 중의 공자다(孔子聖中之泰山, 泰山嶽中之孔子).’
태산의 정상 부근 바위에 새겨진 ‘오악독존(五岳獨尊·오악 중 최고)’./김형찬기자
태산 꼭대기, 공자를 모신 공자묘(孔子廟) 입구에는 이렇게 공자와 태산을 비유하는 글이 써 있다. 공자는 이 태산에 올라본 후에야 “천하가 작은 줄 비로소 알았다”고 했다.
태산은 이러한 공자의 정신적 경지에 비유된다. 중국 역사에서 공자가 황제의 지위에 오르지 않고도 황제의 대접을 받는 유일한 ‘문인(文人)’인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공자는 본래 성인이라고 하기엔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범상치 않은 인물이다. 석가모니나 예수처럼 태어날 때부터 신비로 감싸져 있는 인물이 아니다. 그는 60이 넘은 아버지 숙량흘(叔梁紇)과 젊은 어머니 안징재(顔徵在) 사이에서 야합(野合)으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야합’의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하여간 번듯한 집안에서 일가친척의 축복을 받으며 태어난 것은 아님이 분명하다. 게다가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잃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온갖 잡일을 배우다가 성인이 됐다고 하니 공부도 제대로 했을 리 없다. 말해 놓은 것을 봐도 재기발랄한 천재는 아니다. 다만, 배우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바로 이런 평범한 삶의 모습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는 오히려 더 가깝게 느껴진다. 이 점은 분명히 공자의 매력이다.
이 때문에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 ‘논어’의 편찬자들은 공자의 사상을 체계화하기보다는 공자의 언행을 그대로 전달하고자 했다. 공자가 가르친 것은 바로 인격적으로 완성된 삶의 경지였고, 그 경지는 공자의 삶을 통해서만 전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이를 온전히 전하는 방법은 공자의 언행을 그대로 서술하는 방법뿐이었다.
그 공자의 고향, 공자가 잠들어 있는 산둥성 취푸(曲阜)의 공림(孔林)에는 공자에게 헌사를 바친 황제들의 비석이 그들이 머물렀다는 정자와 함께 웅장한 비림(碑林)을 이루고 있다. 지금도 그를 기리는 사람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고 그들을 손님으로 잡으려는 안내인들이 입구를 가득 메우고 있다. 맹자의 고향인 산둥성 추현(鄒縣)의 맹자(孟子) 사당에 찾는 사람이 드문 것과는 완연히 대조적이다. 2인자의 비애는 2300여년이 지나서도 여전하다.공림에는 이런 사람도 있다.
“저는 공자의 후손이에요. 당신의 미래를 보아드리지요.”
하지만 공자가 창시하고 맹자가 계승한 유가(儒家)는 본래 예(禮)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제후나 세도가들에게 교육, 문화, 정치 등에 관해 조언을 해 주고 그 자녀들의 교육을 담당하던 지식인들이었다. 이런 지식인들 중의 하나였던 공자가 특별히 주목을 받는 이유는 예라는 번잡한 형식을 왜 따라야만 하는가에 대해 설득력 있는 철학적 의미를 찾아서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었다는 데 있다.
공자가 제기한 예의 정신의 핵심은 ‘인(仁)’이었고 인(仁)이란 글자 그대로 ‘두(二) 사람(人)’, 즉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뜻한다. 공자는 천자의 나라였던 주(周)나라가 쇠락하고 제후와 대부들이 발호하던 시대에 각자가 자신의 맡은 바에 충실하며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는 이상적인 관계를 통해 사회의 안정을 추구했던 것이다. 공자에게서 예(禮)에 따라 산다는 것은 경직된 규범에 자신을 옭아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도덕적 욕구를 충실히 따르는 것이다.
하지만 인의 경지에 이른 사람으로는 그가 자신보다도 뛰어난 인재로 지목했던 제자 안연(顔淵)이나, 요(堯)임금, 순(舜)임금 등의 전설적인 성인을 꼽을 뿐, 그 외에는 자기자신을 포함하여 그 누구도 인의 경지에 이른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인’의 경지는 태산으로 비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태산에 올라 태산 높이의 경지를 경외하는 사람들은, 그보다는 좀더 쉬운 길에도 발을 하나 걸쳐두고 싶어 한다. 공자묘에 들러 그 옆, 도교(道敎)의 본산이기도 한 벽하사(碧霞祠)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김형찬기자 철학박사 kh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