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혁명평의회(RCC)가 13일 유엔결의안에 대한 ‘무조건’ 수용 의사를 밝힘에 따라 중동지역의 전운은 다소 엷어졌지만 고작 첫 고개를 넘었을 뿐이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도 “수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의안이 이행되도록 이라크가 협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잘라 말했다. 이라크가 넘어야 할 두 번째 고개는 다음달 8일이 시한인 대량살상무기(WMD) 및 그 개발계획 공개. 이 시점에서 이라크의 선택과 미국 영국의 대응에 따라 이라크 사태가 흘러갈 수 있는 시나리오는 크게 3가지다.》
▽이라크의 전면 협력〓첨단 디지털장비로 무장한 사찰단의 역량을 인정하고 이라크가 솔직하게 WMD의 리스트와 개발계획을 공개할 경우다.
이라크는 그동안 “WMD가 없다”고 공언해 왔지만 미국은 1998년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무기사찰단의 활동을 고의로 방해했던 전력이 있는 만큼 WMD가 없을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단, 미국 등에 군사공격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선 WMD의 완벽한 폐기가 뒤따라야 한다. 이라크는 ‘북한처럼’ WMD를 공개하고 이를 외교적인 지렛대로 활용, 미국의 경제제재 해제 등과 맞바꾸려 할 가능성도 있다. 프랑스나 중국 러시아 등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 이 같은 이라크의 입장에 부분 동조한다면 미영의 이라크공격은 명분을 상당부분 잃게 된다.
▽허위공개 후 ‘시간 벌기’〓이라크가 WMD와 개발계획을 일부는 숨기되 일부는 공개하는 경우다. 축소공개인 만큼 12월 23일부터 시작되는 사찰단의 조사활동을 은연 중 방해할 가능성이 높다.
사찰단이 유엔에 조사보고서를 내는 시한이 내년 2월 21일이므로 ‘축소 및 허위공개’ 여부는 그때까지 밝혀내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가장 유력한 축소공개 대상으로는 대통령궁이 꼽힌다. 사찰팀은 1998년에도 바그다드 등 이라크 전역에 흩어진 8곳의 대통령궁을 사찰하려 했으나 이라크측이 주권침해라고 강력 반발하는 바람에 대충 둘러보는 데 그쳤다.
이번 결의안은 모든 대통령궁에 대해 불시 사찰을 포함한 조건 없는 사찰을 요구하고 있다.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은 최근 이라크의 ‘시간 벌기’를 우려, “(사찰단의 조사보고서 제출 시한인) 내년 2월까지 마냥 기다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이라크 정부가 공개한 WMD 관련 정보가 미국 등이 자체 수집한 정보와 어긋날 경우 미국은 최우선적으로 해당 지역의 사찰을 요구할 것이고 이는 결국 이라크 공격의 빌미가 될 수 있다.
이라크의 ‘시간 벌기’가 성공하느냐는 결국 얼마나 효과적으로 WMD와 개발계획을 숨기느냐에 좌우될 것이다.
▽공개 거부〓이라크가 그동안 WMD의 존재 자체를 부인해 온 대로 다음달 8일에도 “공개할 것이 없다”고 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사찰단의 활동은 시작되지만 이라크 공격을 염두에 둔 명분 쌓기용 조사가 될 가능성이 크다.
지금까지의 미영의 태도로 미뤄볼 때 이라크가 “공개할 것이 없다”고 발표할 경우 이를 ‘공개 거부’로 해석, 독자적으로 군사공격을 단행할 것으로 보인다.
반면 프랑스 중국 러시아 등은 사찰과정에서 이라크의 협조 여부와 사찰 결과 등을 지켜본 뒤 2차 유엔 결의안을 채택해 이라크에 대한 군사제재에 나서자는 주장을 펼 것으로 예상된다.
박래정기자 eco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