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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卷二. 바람아 불어라…(3)

입력 | 2002-11-14 18:03:00


大澤의 회오리(3)

그 사이 갖춘 금 투구 은 갑옷에 공들여 벼린 보검을 찬 진승은 미리 농군을 가장해 들여보낸 첩자들로부터 그같은 진현(陳縣) 성안의 사정을 전해듣자 가슴을 쓸었다. 옛 초나라가 마지막으로 도읍 삼았던 땅이라 한바탕의 악전고투를 각오했으나 이번에도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을 듯했다. 오히려 그 싸움을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는데 활용하기로 하고, 가장 용감한 체 군사들의 선두에 서서 칼을 빼들고 외쳤다.

“두려워하지 말라. 하늘은 포악한 진나라를 버리셨다. 비어있는 성과 장상(將相)의 자리는 먼저 차지하는 자의 것이다!”

그러자 역시 번쩍이는 투구와 갑주로 몸을 감싼 오광이 보기에도 무시무시한 큰칼을 휘두르며 달려나가고 다른 봉기군들도 기세가 올라 다투어 밀고 들었다. 얼마간의 군사와 남겨진 현(縣)의 수승(守丞)이 맞선다고 맞서 보았으나 될 일이 아니었다. 싸움이 시작된 지 한 나절도 안돼 수승은 죽고 남은 군사들은 모두 진승의 무리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날 진승이 얻은 것은 진현의 성곽과 관부(官府)만은 아니었다. 그 동안 진승의 군세는 크게 늘었지만 장수나 모사(謀士) 감은 별로 없었는데, 그곳에서 비로소 쓸만한 인재를 얻게 되었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거의 전설이 되어있던 위나라의 현사(賢士) 장이(張耳)와 진여(陳餘)가 제 발로 찾아온 일이 그랬다.

장이는 하남(河南) 대량(大梁) 사람이었다. 젊어서 위(魏) 공자 무기(毋忌·신릉군)를 섬겨 그 빈객이 된 적도 있었으나, 무슨 일인가로 죄를 짓고 쫓겨 일찍부터 멀리 외황(外黃) 땅에서 떠돌았다. 그런데 외황의 한 부잣집에 매우 아름다운 딸이 있었다. 보잘것없는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가 도망을 쳐서, 한때 아버지의 빈객노릇을 했던 사람에게 몸을 숨겼다. 장이를 잘 알고 있던 그 사람이 옛 은인의 딸에게 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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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장이란 사람을 알고 있소. 반드시 어진 남편을 얻으려면 그를 따르도록 하시오.”

이에 그 여자는 남편과 헤어지고 장이에게로 시집을 갔다. 부잣집 딸을 아내로 맞게된 장이는 이후 자질구레한 세상살이의 근심을 잊어버리고 널리 벗들을 사귀며 다녔는데, 처가에서 후하게 뒤를 봐 주어 천리 먼 곳에 있는 사람까지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위나라에 벼슬하게 되어 외황의 수령(守令)이 되었으며 이름도 더욱 높아졌다.

진여도 대량 사람으로 그는 유가(儒家)의 학술을 좋아하였다. 젊어서 조나라 고경(苦俓) 땅을 자주 드나들었는데, 그곳의 부자인 공승씨(公乘氏)가 그를 좋게 보아 딸을 주었다. 고향이 같고 둘 모두 부잣집 사위가 된 게 무슨 인연이 되었는지, 진여는 젊어서부터 장이를 아버지처럼 섬기며 서로를 위해 목이 날아가도 아까워하지 않을 정도로 깊은 교분[문경지교]을 맺었다.

위나라가 망하자 두 사람은 모두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런데 몇 해 뒤 진나라는 그들이 위나라의 명사(名士)라는 소문을 듣고 혹시라도 사람들을 충동질해 딴 짓을 할까 걱정되었다. 장이에게는 천금, 진여에게는 오백 금을 상금으로 걸어 그들을 잡으려했다.

이에 장이와 진여는 이름을 바꾸고 함께 진(陳)땅으로 숨어들어 어떤 작은 마을의 문지기 노릇을 하며 살게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서서 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어느 날 돼먹잖은 아전바치 하나가 별 것 아닌 일로 꼬투리를 잡아 진여를 매질했다. 진여가 참지 못해 대들려고 하자 장이가 가만히 진여의 발등을 밟아 말렸다. 그리고 매질이 끝난 뒤 진여를 근처의 뽕나무 아래로 데려가 엄하게 꾸짖었다.

“내 일찍이 공에게 무어라 하였소? 작은 치욕을 참지 못하면 큰 일을 그르치는 법이오. 이만 일로 하찮은 아전바치에게 목숨을 내던질 작정이시오?”

진여도 장이의 그같은 말을 옳게 여겼다. 그 뒤로는 더욱 조심하여 있는 듯 없는 듯 숨어살았다. 그리하여 지난 십 년 그 두 사람이 어디에 숨어있는지도 몰랐는데, 이제 홀연히 진승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진승이 매우 기뻐하며 그들을 맞아들였음은 말할 나위조차 없다.

그 때 진승은 삼로(三老·秦, 漢 때의 향관. 지방 敎化를 담당)를 비롯한 진현의 향임(鄕任)들과 지방의 호걸들을 모두 관아에 불러 모아놓고 있었다. 구실은 함께 진현의 앞날을 의논한다는 것이었으나 실은 수졸들과 형태를 달리하는 그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새로운 권위를 구축하기 위해서였다.

처음 진나라에 반기를 들 때 진승은 진나라 태자 부소(扶蘇)를 오광은 초나라 명장 항연(項燕)을 가장하였다. 아직까지 힘을 지닌 진(秦)제국의 권위에 의지함과 아울러 세월이 지나도 꺼질 줄 모르는 옛 초나라 유민들의 한(恨)에 호소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채 두 달이 지나기도 전에 사정은 크게 달라졌다.

많은 사람들이 반진(反秦)의 깃발 아래 몰려들면서, 진승과 오광을 알아보는 사람도 늘어, 이제 더는 그들이 양성(陽城)의 진(陳)아무개와 양하(陽下)의 오(吳)아무개였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생각보다 진의 권위는 약해 부소라는 이름은 큰 힘이 되지 못했고, 항연의 전설도 벌써 십여 년이 지나면서 희미해져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을 사칭하는 것은 효과도 없는 상징을 유지하기 위해 거짓말로 억지를 부리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진승과 오광이 머리를 맞대고 짜낸 꾀가 백성들의 추대라는, 낡았지만 그래도 아직 효과가 있는 권위형성 방식이었다. 그들은 믿고 부리는 졸개들을 몰래 풀어 진(陳)땅의 향신(鄕紳)과 부호(富豪)들을 한편으로는 달래고 한편으로는 위협했다.

“이미 진나라의 천운은 다했오. 당신들은 우리 장군(진승)을 왕으로 추대해 새 세상을 도모하시오. 그리되면 지금 가진 것을 모두 그대로 누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재물이든 땅이든 벼슬이든, 망해 가는 진나라로부터 뺏은 것은 모두 전리품으로 나눠 받게 될 것이오. 하지만 만약 우리 장군께 맞선다면 아무 것도 지켜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살아남기조차 어려울 것이오. 당신들의 재산은 우리의 군비로 몰수되고, 가솔들은 모두 병졸로 끌려갈 것이며, 종당에는 당신들의 목숨조차 천하를 뒤덮은 난군의 손에 넘겨질 것이외다!”

진현의 호걸들 일부는 겁을 먹거나 꾀임에 넘어가고, 일부는 나름의 신선한 기대에 차서 그 말을 받아들였다. 부름을 받고 관아에 모이기 바쁘게 입을 모아 진승에게 권했다.

“장군께서는 몸소 갑옷을 걸치시고 날카로운 칼을 잡으시어 무도한 군사를 무찌르고 포학한 진나라를 쳐 없앴습니다. 이제 옛 도읍이었던 이 땅에 걸터앉으시어 원통하게 망해버린 초나라를 되세우려 하시니, 그 공을 헤아려 볼 때 왕을 일컬음이 실로 마땅합니다. 게다가 아직 천하가 정해지지 않아 하실 일이 많으니,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제후들이 엇나가지 않게 살피기 위해서라도 장군께서 왕이 되셔야 합니다. 바라건대 부디 초나라 왕위에 오르시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해 주십시오.”

그러자 진승은 겸손한 척 대답을 미루고 안으로 들어와 장이와 진여에게 가만히 물었다.

“지금 저들이 내게 초나라 왕이 되라는데 선생들은 어떻게 보시오?”

“저 진나라는 무도하여 남의 나라를 멸망시키고, 사직(社稷)을 없애버렸으며, 후사를 끊어놓았습니다. 잦은 싸움으로 백성들을 피폐하게 하였으며, 그 재물을 모두 긁어갔습니다. 이러한 때 장군께서는 두 눈을 부릅뜨고 담력을 크게 내시어 만 번 죽을지언정 구차히 살기를 바라지 않겠다는 결의로 잔악한 무리를 쳐 없앴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바야흐로 진(陳) 땅에 오셨는데, 여기서 왕위에 오르신다면 이는 사사로운 욕심을 천하에 드러내는 것이 됩니다.

바라건대 장군께서는 왕위에 오르시는 것을 미루시고, 빨리 군사를 몰아 서쪽으로 가신 뒤에 사람을 풀어 옛 육국(六國)의 적통(嫡統)으로 뒤를 잇게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장군에게는 한편이 늘어나고, 진나라에게는 적이 불어나게 될 것입니다. 적이 많아지면 힘이 분산되고, 한편이 많으면 군세는 강해지는 법입니다. 들에서는 싸우는 병사가 없고, 성에는 버티고 지키는 자가 없게되면 저 포악한 진나라를 쳐 없애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진나라를 쳐 없애신 뒤에는 그 도읍 함양에 웅거하시어 천하의 제후들을 호령하십시오. 제후들은 모두 한번 망했다가 장군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나게 된 이들이니, 덕으로서 그들을 복종시킨다면 제왕(帝王)의 대업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만 진(陳)땅에서 왕이 되신다면 이는 천하를 다시 조각나게 하는 일이 되지 않을까 실로 두렵습니다.“

두 사람이 입을 모아 그렇게 말렸다. 그러나 이미 먹은 마음이 있는 진승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가더니 진현의 향관과 토호들의 권유에 못이긴 척 왕위에 오르고 말았다.

진승은 새 나라 이름을 ‘장초(張楚)’라 하고, 자신을 대초왕(大楚王)이라 부르게 했다. 바로 ‘초(楚)’를 나라이름으로 쓰지 못한 까닭은 아직 그 옛 왕족과 유신들이 많이 있어 혈통에 바탕한 정통성 시비에 휘말릴 까 꺼려서인 듯하다.

진승이 한낱 수졸(戍卒)에서 몸을 일으켜 여러 고을을 자리 말듯 휩쓸고 마침내 진(陳)땅에서 왕위에 올랐다는 소문은 살별보다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러자 마른 풀밭에 불길 번지듯 사방으로 반란의 불길이 번져갔다. 진나라 관리도 겁을 먹고, 그 장수도 달아나며, 그 군대도 싸움에 질 때가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참고 있던 백성들이 일시에 들고일어났다. 그리하여 군수나 현령을 목베고 그 군사를 쫓아버린 뒤 스스로 진승을 찾아와 그 밑에 들기를 빌었다.

진승은 마치 그런 변화를 미리 헤아리고 있었다는 듯이나 그들을 흡수하여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갔다. 뿐만 아니라 진나라와 천하를 다툴 세력으로 그들을 조직할 줄도 알았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진승을 열전(列傳)에 넣지 않고 세가(世家)에 넣어 육국(六國)의 왕들이나 제후들과 같이 대접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와 같은 왕자(王者)의 자질을 높이 산 까닭일 것이다.

진승은 먼저 오광을 가왕(假王·여기서는 代理王의 뜻)에 임명하여 여러 장수와 군사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형양(滎陽)을 치게 했다. 또 진현 사람 무신(武臣)에게는 장이(張耳), 진여(陳餘)를 딸려 북으로 옛 조나라 땅을 공략하게 하고, 여음(汝陰) 사람 등종(鄧宗)에게도 군사를 나눠주어 남쪽 구강군(九江郡)으로 밀고 들게 했다. 일찍이 기현에서 동쪽으로 길을 잡게 한 갈영(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