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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미기자의 섹스&젠더]노란 비, 우디 앨런

입력 | 2002-11-14 18:08:00


노란 비가 내렸다.

회색 아스팔트 도시에 노란색 은행잎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수북이 쌓였다가 이내 바람에 휩쓸렸다.

노란 비가 내리는 날은 빨간 비(빨간색 단풍이 떨어지는 것)가 흩뿌리는 날보다 조금 더 센티멘털해진다. 회색 속에 도드라지는 노란색은 명도 대비 때문인지 유난히 우울해 보인다.

이미 먼 옛날 이야기가 돼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지나간 사랑이, 흘러버린 시간들이 골목길 어귀에 세워진 낡은 자전거처럼 문득문득 떠오른다.

그날은 6일 오후 5시였다. 서울 홍익대 앞 ‘시네마테크 떼아뜨르 추’는 ‘DVD 기획감독전-우디 앨런 회고 스페셜’이란 이름으로 미국 뉴욕의 입담꾼 영화감독 우디 앨런의 1977년작 영화 ‘애니 홀’을 상영하고 있었다.

1985년 작고한 연극인 추송웅씨를 추모해 1월 영화공간으로 거듭난 떼아뜨르에는 프란츠 카프카 원작의 ‘빨간 피터의 고백’ 공연시절 추씨의 흑백사진들이 곳곳에 걸려 있다.

●“남녀관계는 마치 상어와 같아서 계속 전진하지 않으면 끝이다.”(‘애니 홀’에서 ‘앨비 싱어’를 연기한 우디 앨런의 대사 중)

최근 결혼한 30대 여자는 결혼을 앞둔 어느날 밤 집에서 TV를 보다가 자신이 지금까지 연애했던 남자들의 이름을 무심히 신문지 위에 연필로 끄적여 보았다고 했다. 10여명의 남자 이름이 TV프로그램 안내 지면 위에 써졌다고 했다.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처럼 별 헤듯 남자를 헤아리며 결혼은 운명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사실 A라는 남자는 이래서 좋았고, B라는 남자는 저래서 좋았던 것 같아요. 결혼할 타이밍이 됐을 무렵 만나는 남자와 언약을 하고 같이 살게 되는 것, 그것이 결혼 아닐까요.”

지난달 25일 이 칼럼을 통해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고?’란 제목의 글을 쓴 이후 25세 여성 독자가 e메일을 보내왔다.

“대학 이후 항상 남자친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남자친구를 사귀고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건, 칼럼에서처럼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이 어렵다면 미련없이 이별을 택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발견하는 것은 처음에는 상대방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있다가(아마도 그럴 수 있다고 착각한 것 아닐까요) 어느 순간 그동안 감수했던 희생과 노력들에 지치기 시작하면 돌아서는 내 자신의 모습입니다. 그럴 바에는 애초부터 상대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게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요.”

최근 기자와 만난 30대 남자(기혼)는 첫사랑과의 재회를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만남”이라고 표현했다.

“첫사랑은 남편과의 결혼생활이 원만하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녀의 집에서 섹스를 했습니다. 그런데, 제 몸이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에게 ‘불안해서’라고 둘러댔지만 실은 그녀에 대한 옛 감정이 흔적없이 사라진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라는 드라마 제목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남녀관계는 비이성적(irrational)이고, 광적(crazy)이고, 부조리(absurd)하다.”(우디 앨런)

인터넷 여성 포털사이트 ‘여자와닷컴(yeozawa.com)’에 한 여성 네티즌이 9월 게재해 5000명 이상 조회한 글의 제목은 ‘남자친구의 옛 여자’이다.

‘사귄 지 얼마 안 된 남자친구는 절 볼 때마다 몇 년 전 사고로 죽은 옛 애인이 생각난대요. 절 만나면 행복하지만 그 행복은 제가 옛 애인과 닮았기 때문인 것 같다고요. 옛 애인과 약속을 했었대요. 어느 한쪽이 먼저 세상을 뜨면 남은 쪽은 절대 결혼하지 말자고.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남자들은 정말 과거에 죽도록 사랑한 여자가 있다면 또다른 사랑을 시작할 수 없는 걸까요.’

30대 남성 독자(미혼)가 기자에게 최근 보내온 e메일은 2세 연상의 이혼녀와의 교제에 따른 고민을 토로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한다면 함께 헤쳐나갈 수 있겠다”고 답변 메일을 보냈더니, 그는 다시 회신해 왔다.

“이혼 후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여자는 대학시절 내가 짝사랑했던 선배입니다. 최근 우연히 다시 만나게 돼 급속도로 가까워졌지만 그녀는 나를 타이르듯이 애써 밀어내려고 합니다. 15년 전 그녀는 수줍음이 많고 고왔는데, 첫 결혼에서 깊은 마음의 상처를 얻은 뒤 바위처럼 단단해졌습니다. 그녀의 영혼을 감싸안고 싶다가도 시골의 부모님을 생각하면 불효한다는 갈등이 생깁니다. 그동안 남 얘기인 줄만 알았던 호주제의 폐해가 바로 나의 고통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kimsun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