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데넷/앤드루 브룩, 돈 로스 엮음 석봉래 옮김/480쪽 2만원 몸과마음
자연과학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설명할 수 있을까? 그렇게 될 경우 세상은 너무 각박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으며, 이런 이들에게 인간의 마음은 자연과학적 공격으로부터의 피난처 역할을 해왔다. 인간의 마음에는 다른 자연 현상에서 볼 수 없는 특별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으며, 이들은 영원히 자연과학의 사거리 밖에 남는다는 입장이 때로는 주장의 모습으로 때로는 희망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들이 주로 무기로 삼는 마음의 특징은 두 가지다. 첫째는 믿음과 욕구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외부의 사실들을 내용으로 담는 특징이며, 둘째는 빨간색의 영상, 우울함, 환희 등 의식의 파노라마가 연출되는 특징이다.
인지 심리학, 신경과학, 진화 생물학 등에 대한 포괄적 연구를 토대로 하여 인간의 마음의 본성을 탐구하는 미국의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20세기 후반에 새로이 대두된 학문인 인지과학을 선도하는 다니엘 데넷은 마음에서 나타나는 내용과 의식을 과학의 사거리 내로 몰아넣는 철학계의 과학주의자다. 극단적인 주장과 깊은 통찰력으로 철학과 과학 양 분야로부터 주목을 받는 데넷이 근래에 대우학술재단의 초청으로 연속 강연을 하였고, 이에 때맞추어 올해 출판된 브룩과 로스가 편집한 ‘다니엘 데넷’이 우리말로 번역 출판되었다. 이 책은 위에서 말한 의식과 내용에 진화를 더한 데넷의 세 관심사를 중심으로 하여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서론에서 의식, 내용, 진화에 대한 데넷의 입장이 무엇이며, 이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데넷의 간략한 개인적인 전기와 사상적 발전을 통하여 소개한다. 그리고 다음에 실린 논문들은 데넷의 철학적 입장에 대한 조망과 아울러 그의 철학이 철학 이외의 분야에 끼친 영향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이 책을 통하여 드러나는 데넷의 철학적 모습의 중심에는 진화론이 자리잡고 있다. 인간의 두뇌는 진화의 결과로 만들어진 복잡한 체계이며, 이 체계는 주변의 환경과 잘 어울리면서 생존에 유리하게 체계적으로 행위하게끔 생명체를 인도한다. 이러한 존재가 출현하면 우리는 그 존재를 일정한 목적을 갖고 일정한 욕구와 믿음에 따라 행위하는 존재로 해석하게 된다. 따라서, 믿음과 욕구를 부여하는 것은 고도로 진화된 생명체를 해석하기 위한 도구인 것이지, 그 자체가 아무런 신비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의식에 대하여도 데넷은 마찬가지로 환상을 추방하는 역할을 자처한다. 데넷은 우리가 의식 현상이라고 간주하는 것들이 우리의 마음 속에 확고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놀라운 주장을 제시한다. 근래 커피의 맛이 당신에게 다르게 느껴진다고 하자. 이 경우 커피의 맛 자체가 달라진 것인가, 아니면 맛은 그대로인데 그 맛에 대한 당신의 반응이 달라진 것인가? 데넷은 이는 대답 수 없는 질문임을 지적하면서, 의식에 관한 발상의 전환을 제안한다. 의식의 상태란 우리의 두뇌를 이루는 여러 체계들이 세계에 관한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각기 불완전한 상태로 제시하는 것이며, 이는 특정한 완성 단계에 들어가지 않은 채 여러 하부 체계에 의하여 지속적으로 편집되고 수정된다는 것이다.
명성에 걸맞게 데넷에 관한 논문집은 이미 여러 권 출판되었다. 그러나 이 책은 중요한 점에서 기존의 책들과 구별된다. 이 책은 데넷의 철학적 주장을 소개함과 아울러, 데넷의 철학이 철학 이외의 분야에 끼친 영향을 중심적으로 소개하면서 논의한다. 의식에 대한 데넷의 연구가 실험심리학, 인공지능, 신경과학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고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를 논의하며, 내용에 대한 데넷의 연구가 자폐증을 비롯한 발달심리학, 인지동물행동학에 미친 영향을 논의한다. 이와 아울러 진화론에서의 데넷의 역할도 논의된다. 이 책은 인지과학에 참여하고 있는 철학자가 과학과 관련을 맺으면서 철학적 논의를 전개하는 최근 경향을 보여주며, 철학자가 과학에까지 기여할 수 있는 구체적인 예를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데넷이라는 현대의 영향력 있는 한 철학자에 대한 좋은 입문서일 뿐 아니라, 과학과의 긴밀한 관계가 강조되는 새로운 철학적 흐름을 읽어볼 수 있는 흥미있는 책이다.
김기현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인지과학 협동과정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