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11월 23일 강원 속초시 실향민탑 광장. 민자당 김영삼(金泳三) 대통령후보의 선거 유세가 열리고 있었다. 김 후보는 이곳의 지역적 특성을 감안해서인지 농어민 보호 공약에 상당 시간을 할애했다. 특히 “대통령직을 걸고서라도 쌀시장은 절대 개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로부터 1년1개월이 지난 93년 12월 23일, 김영삼 대통령은 대(對)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새로운 국제경제 환경으로 나아가기 위해 쌀시장을 개방키로 했으니 국민 여러분은 헤아려 달라”는 것이었다.
현재 우리의 주요 경쟁국들은 주변국과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서두르고 있다.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계속되고 내수시장이 한계를 맞고 있는 상황에서 FTA는 곧 ‘믿을 만한 시장’의 확대이자 경제구조의 선진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중국이 이달 초 동남아국가연합(ASEAN)과 FTA 협상 추진에 공식 합의한 것도 사실은 FTA를 통해 화교자본이 지배하고 있는 동남아 경제권을 ‘안방’으로 만들겠다는 전략에서다. 미국이 남북미 34개 국가를 아우르는 미주자유무역협정(FTAA)을 서둘러 추진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국은 어떤가.
지난주 서울 여의도에서는 7만여명의 농민이 모여 칠레와의 FTA 체결을 반대하는 집회를 가졌다. 집회에 참석한 유력 대선후보들은 연설 도중 간간이 “(농업)개방을 반대하겠다”고 했다. 언뜻 듣기에는 ‘칠레와의 협정에 반대한다’고도 해석할 수 있는 발언이다.
또 김석수(金碩洙) 국무총리는 얼마 전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린 ‘ASEAN+3’정상회의에서“(FTA 체결은) 국내문제 때문에 장기적으로 검토할 사안으로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다”고 말했다. 중국과 일본이 아시아 경제의 맹주(盟主)를 차지하기 위해 벌이는 공세에 익숙해 있던 참석국가 대표들로서는 한국의 소극적 태도에 의아해 했으리라.
이어 정부는 14일 싱가포르와 FTA 체결을 위한 협상 시작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농업관련 우려가 적어 싱가포르를 선택했다”는 설명과 함께. ‘우리에게 이로운 산업은 자유롭게 교역하고 불리한 산업은 나중에 보자’는 논리다. 시장 잠재력이 어마어마한 중국 등과의 FTA는 ‘내부 문제’ 때문에 한참 미루겠다는 것이다.
FTA 확대가 세계 경제의 새로운 흐름이라고 인정한다면 경제구조가 수출 중심인 한국은 이를 거스를 수도, 외면할 수도 없다.
문제가 있다면 핵심을 피해 갈 것이 아니라 정면에 서서 해결하려는 솔직하고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한 시점이다. 농업이 걸림돌이라면 정치권과 정책결정자들은 직접 농민들을 만나 함께 고민하고 대안을 찾는 ‘믿음직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10년 전 김 전 대통령이 했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임기응변과 인기 영합성의 발언만 일삼는다면 결국 그 부담은 국민이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병희 경제부 차장 bbhe424@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