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휴대전화 ‘애니콜’ 개발의 주역으로 경쟁사인 팬택으로 자리를 옮긴 이성규(李成揆·49) 사장의 전직(轉職)은 정당하다고 법원이 판결했다.
이번 판결은 대기업 고급인력이 일정 조건이 갖춰지면 중견 혹은 벤처기업으로 옮기는 것을 사실상 인정한 것. 따라서 앞으로 전문경영인과 기술자들이 회사와 맺은 전직 금지 등의 약정에도 불구하고 ‘보다 자유롭게 이직(移職)’할 수 있게 될 전망이다.
서울고법 민사5부(양동관·梁東冠 부장판사)는 18일 삼성전자가 팬택의 이 사장을 상대로 낸 전업금지가처분 신청에서 원심대로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이 사장이 (삼성에서) 담당했던 업무와 관련된 자료를 가져가지 않았고 무선 단말기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다는 점, 이 사장이 현업을 떠나 1년간 미국연수를 받았다는 점에서 이미 전직금지기간을 넘긴 것으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법원은 이번 판결로 퇴직 후 1, 2년간 동일 업종에 재취업하거나 회사를 세우지 못하도록 하는 ‘전직금지’나 ‘경업(競業)금지’ 등 기업약정은 극히 제한적으로 적용돼야 한다는 것을 재확인했다.
재판부는 또 “퇴직 후 영업비밀유지기간을 장기간 인정할 경우 경제적 약자인 근로자의 직업선택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며 “3년간 동종업종에 취업할 수 없다는 원고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이 사장은 삼성전자 이동통신 단말기 개발팀장으로 근무하면서 ‘애니콜’ 휴대전화기를 개발해 한국시장은 물론 해외시장까지 석권, 국내 이동통신 산업에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 사장이 2000년 3월 돌연 삼성전자에 사표를 내고 이동통신 단말기 생산업체인 팬택 사장으로 전직하자 삼성이 부당 스카우트를 했다며 팬택을 제소했다. 이 사장은 삼성측의 항의가 계속되자 일단 삼성으로 복귀한 뒤 1년여간 미국 연수를 다녀왔으며 지난해 9월 다시 팬택의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했다. 이 사건은 대기업과 벤처기업간 우수인력 쟁탈전의 상징적인 사건 중 하나로 관련업계의 주목을 끌어왔다.
길진균기자 le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