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돈은 이렇게 쓰는 거야. 누구는 이웃돕기에 쓰라는데 그랬더라면 이렇게 확대 재생산 됐겠습니까.”
한국과학기술원(KAIST) 바이오시스템학과가 IBM에서 SUR상(Shared University Research Award)을 받게 되었다는 말을 듣자 정문술 선생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였다.
IBM SUR상은 미국 IBM 왓슨연구소가 전 세계에서 우수한 연구팀을 선정해 연구장비를 제공하고 공동연구를 진행하는 제도다.
▼벤처대부 정문술 선생의 기부▼
올해에는 생명과학분야에서 6개 연구팀을 뽑았는데 한국에서는 최초로 KAIST의 신설학과인 바이오시스템학과가 선정된 것이다. 부상으로 슈퍼컴퓨터 P690을 받고 바이오정보 분야의 공동연구를 시작하게 됐다. 가격이 81억원이나 하는 이 슈퍼컴은 지난해 국가 슈퍼컴센터에서 크레이 컴퓨터를 퇴장시키고 새로 도입한 것과 같은 모델의 컴퓨터다.
신설학과가 세계 최고 기업의 공동연구 파트너로 인정받게 되자 누구보다 기뻐한 사람은 정 선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바로 이 학과의 설립 아이디어를 내고 돈을 댔기 때문이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정 선생은 한국 ‘벤처의 대부’로 알려져 있다. 1980년대 중반 벤처기업인 ‘미래산업’을 시작해 죽을 고비를 넘기며 우량기업으로 키워냈다. 그리고 작년 초 홀연히 경영권을 전문경영인에게 물려주었다.
그리고 그는 “우리 국민이 10년 뒤 뭘 먹고살아야 할지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정보기술(IT)과 생명공학기술(BT)의 융합분야를 다루는 바이오시스템학과를 만들어 10년 후 우리 국민을 먹여 살릴 인재를 길러주십시오”라는 말과 함께 평생 모은 300억원을 KAIST에 기부했다. 그러면서 교수들에게는 “남들이 하는 것을 모방하라고 이 돈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새로운 것을 연구해 주십시오”라고 당부했다. 개인이 국가장래를 걱정하며 재산을 내놓자 정부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200억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바이오시스템학은 미국과 유럽에서도 이제 막 시작하는 분야다. 미 코넬대와 캘리포니아주립 버클리대가 몇 년 전에 설립했고 스탠퍼드대와 매사추세츠공대(MIT)도 관련 분야를 묶어서 특별 과정으로 운영하고 있다.
바이오시스템학에서는 크게 세 분야를 중시한다. 바이오 정보, 바이오 전자, 바이오 나노 분야가 그것이다. 바이오 정보 분야는 생명현상의 특성을 결정하는 유전자 순서와 단백질 구조를 연구한다. 신약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인체나 동물실험을 해야 하는데 이는 시간과 돈이 많이 든다. 그런데 약물이 작용하는 유전자와 그 특성을 알면 컴퓨터를 이용한 실험이 가능하다. 시간과 돈을 엄청나게 절약할 수 있는 것이다.
바이오 전자는 주로 인간의 뇌와 신경계를 연구하는데 특히 생체신호와 전자신호 사이의 교류를 가능케 한다. 결국 인간이 인공 신체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어 ‘600만불의 사나이’도 가능케 되는 것이다. 장애인이나 노인에게는 복음 같은 소식이다.
신체에 붙이고 다니는 기구가 커서는 안 된다. 매우 작아서 우리 몸과 구별이 안 될 정도로 가볍고 튼튼해야 한다. 심지어 몸 속이나 혈관 속에 로봇이 들어가 생리현상을 측정하고 생체기능을 대신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가능케 하는 소형화 기술이 바이오 나노기술이다. 즉 심장 로봇, 위장 로봇, 간 로봇 등을 몸에 달고 다닐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바이오시스템학 세계서 인정▼
이런 첨단분야를 시작할 때 큰 문제는 교수 확보였다. 전 세계를 통틀어 이런 분야의 전문가가 몇 명 안 되고 그들의 몸값이 비싸서 한국에 오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교 안팎에서는 왜 유명교수를 유치하지 못하느냐는 성화가 빗발쳤다.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너무 서둘러 시작한 것 아니냐는 비난도 있었다.
그러나 정 선생의 반응은 역시 그의 주특기인 ‘거꾸로 경영’ 스타일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선두주자라는 증거입니다. 교수가 되겠다고 줄을 서 있는 분야라면 나는 투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과연 그의 말대로 생물 전자 전산 기계 분야에서 모인 국내 교수 5명으로 이루어진 학과가 이번에 세계 선두에 서 있음이 증명되었다. 우리나라 ‘벤처대부’의 ‘두 번째 벤처’인 바이오시스템학은 이런 역발상의 힘으로 출항했고 다시 IBM의 후원이라는 순풍까지 만났다. 이제 세계와 미래의 바다를 힘차게 헤쳐나갈 일만 남았다.
이광형 한국과학기술원 국제협력처장 바이오시스템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