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대선에 출마한 국민당 정주영 후보는 “집권하면 아파트 채권입찰제를 폐지해 분양가를 절반으로 내리겠다”고 약속했다.
폭등하는 집값으로 고통받던 서민층을 공략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웬만한 인기지역 아파트를 분양받으려면 건설업체가 책정한 분양가보다 더 많은 액수의 채권을 사야 하는 경우가 흔했으므로 채권입찰제를 폐지하면 부담을 낮출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정부가 채권액만큼의 차액인 억대의 불로소득을 합법적으로 보장해 줄 수는 없는 일. 정 후보의 약속은 전형적인 선심성 공약으로 치부됐다.
실제로 채권입찰제가 폐지된 지금 아파트 분양가는 시장에서 형성되지 정부가 미리 가격을 정해주면서 분양하도록 간섭하지 못한다.
2001년 8·15 경축사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3년 내 200만개의 새로운 일자리 창출을 약속했다.
매년 학업을 마치고 새로 사회로 나오는 취업희망자수는 35만∼50만명. 경제학자들은 한국의 잠재성장률을 대략 5∼7%로 보고 있으며 1% 성장시 7만개 정도의 일자리가 창출되는 것으로 추산한다. 따라서 신규 취업희망자의 일자리를 만들려면 잠재성장률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
이와 별도로 기존 실업자를 줄이기 위한 일자리가 필요하다면 그만큼 성장률이 높아져야 한다. 3년에 200만개라면 연간 67만개 정도의 일자리를 만들어야 하므로 이것만으로도 연 9.5%의 성장이 필요하다. 현재 여건으로는 무리한 목표이다.
올해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똑같이 임기 중 250만개의 새로운 일자리 창출을 약속했다. 이를 위해서는 연간 7.1% 정도의 성장이 필요하다.
문맥상 이는 기존 실업자를 줄이겠다는 것이므로 신규 취업희망자들을 위한 최소 5%의 성장과는 별개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약속을 지키려면 연간 12% 정도 성장해야 한다. 인플레로 거품을 일으키지 않고서는 달성하기 어려운 성장률이다.
그런데도 한나라당은 연간 6% 이상, 민주당은 연간 7% 정도의 성장을 공약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런 성장률로는 임기 중 250만개의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 없다.
물론 ‘일자리 나누기’ 같은 사회정책적 수단을 통해 성장과는 무관하게 일자리를 어느 정도 늘릴 수 있겠지만 이는 한계가 있다.
미래의 목표는 중요하다. 때로는 약간 무리하다 싶은 목표가 동기를 유발해 발전의 원동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선거 때마다 반복되는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 되지 않으려면 실현 가능성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있어야 한다. 일단 뱉어놓고 ‘안 되면 말고’ 식이어서는 곤란하다. 특히 경제관련 공약은 복잡한 수치 때문에 대다수 국민이 실상을 모른 채 받아들이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잠깐 국민을 속인다 해도 이는 결국 부메랑이 되어 임기 중 정부 부담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김상영 경제부차장 young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