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가나 대통령 선거 얘기다. 당연한 일이다. 대통령을 한 번 잘못 뽑고 나면 나라의 살림이 거덜나서 국가경제의 주권을 잃는 처지에 빠지기도 한다. 혹은 북방경계에 대한 방비 소홀과 병원 파업의 수수방관으로 국가와 국민의 생명을 지켜주는 안보체제의 기본 틀마저 위태롭게 하기도 한다.
독일(옛 서독) 국민은 1949년 건국 후 역대 정권마다 적시적재의 훌륭한 지도자를 총리로 선출한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그에 비해서 한국 국민은 한번도 대다수 국민의 존경을 받는 지도자를 대통령으로 추대해 본 일이 없는 것 같다. 역대 대통령의 불행한 말로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정보는 뒷전…자극만 가득▼
그러나 어떤 제왕적 대통령, 또는 어떤 어설픈 대통령을 뽑고, 어떤 부정 비리 부패가 그 주변에서 빚어진다고 하더라도 남녘의 우리에겐 북녘의 동포와는 달리 희망과 위안이 있다. 대통령의 임기가 머지않아 끝난다는 사실이 곧 그것이다. ‘공화국’이 세습권력의 사이비 ‘인민공화국’과 다른 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영구 권력, 임기도 없는 제왕적 권력으로부터 마냥 자유롭다 할 수 있을 것인가. 대통령 이상으로 온 국민의 일상생활의 공간과 시간에 개입해 들어와서 그들의 행동과 의식을 지배하는 또 다른 권력이 있으니 말이다.
이 권력 앞에는 야당도 없고, 의회의 견제도 없고, 언론의 비판도 없다. 대통령이 바뀌고, 정권이 수직적 수평적으로 교체되고, 그 권좌에 군부정권에 빌붙은 사람이 앉건 민주화 대열에 섰던 사람이 앉건, 이 무한 권력의 행태에는 변화도 차이도 없다. 우리나라의 TV 방송을 두고 하는 말이다.
특정 방송사의 특정 프로그램을 문제삼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공영방송이나 상업방송의 구별 없이 모든 TV 방송의 기본적인 편성이나 프로그램 내용이 우리나라에서는 ‘비판 없는 권력’이 과연 어디까지 타락하는지를 일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방송 뉴스의 시작은 어디서나 일종의 시보(時報)구실을 한다. 그러나 한국의 TV 3사의 아침 6시 뉴스는 5시57분이나 58분이면 이미 시작한다. 그것이 뉴스의 속보경쟁이란 말인지. 오늘날 외국인이 가장 먼저 배우는 한국말이 ‘빨리빨리’라고 한다. 그러한 한국인의 조급증을 TV의 아침뉴스부터 부추기고 있는 꼴이다.
그런가 하면 방송사마다 1시간을 끄는 세계에서 가장 긴 저녁 뉴스의 지루함과 내용의 빈약함…. 중요 정치인이나 경제전문가의 담화는 예사로 말의 중간에 성급하게 잘라 버리면서도 시시콜콜한 길거리 소녀의 날씨타령은 머뭇거리는 얘기를 끈기 있게 끝까지 ‘생중계’한다.
중동에 새로운 전운이 감돌고 새로운 경제위기가 기웃거려도 그에 관한 보도나 해설을 위해 어느 시골길의 교통사고나 어느 골목집의 화재사고 보도가 양보하는 법이 없다.
유혈이 낭자한 국문 고문의 장면, 살인 효수의 장면, 산실의 분만장면 등을 신물이 나도록 슬로비디오로까지 가정의 안방에 보여주고 있는 드라마에 질세라, 뉴스보도에도 무좀 걸린 발바닥, 내시경으로 들여다본 사람의 오장육부, 영안실의 시체, 심지어 살인의 현장 등 온갖 혐오스러운 장면을 시청자에게 보여주는 TV 방송이 세계에 또 있는 것인지.
어린이들은 부모나 교사보다 더 많은 시간을 TV와 같이 하고 있다. 인구 1000만 도시 서울에 조차 ‘노래방’말고는 제대로 운영되는 연극극장 음악당도 별로 없는 이 나라의 어른들에게 문화향수란 TV시청이 고작이다. 뿐만 아니라 시민의 소비생활을 직간접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이 또한 TV이다.
▼'소비의 강제수용소' 언제까지…▼
소련의 붕괴 이후 러시아의 ‘성난 시인’ 예브투센코가 “이제는 ‘강제 집단주의화’ 대신 ‘강제 자본주의화’를 경험하고 있다”고 말한 일이 있다. 우리는 오늘날 TV를 통해 노동의 강제수용소가 아니라 소비와 낭비, 사치의 강제수용소에 갇혀 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이 될까. 제왕적 권력을 갖는 제왕적 교사인 TV, 시민의 문화생활 언어생활 여가생활 소비생활을 지배하는 제왕적 주재자 TV.
올해가 지나면 대통령이야 달라지겠지.
그러나 올해가 지난다 해서 TV도 달라질까.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언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