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트레이디는 옷차림으로도 정치를 한다.
고르바초프 구소련 대통령의 부인 라이사 여사는 빨간색 정장과 하이힐, 화려한 꽃무늬 셔츠, 모피 코트 등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패션 아이템을 즐겨 입어 서방 언론으로부터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을 라이사 여사의 의상에서부터 느낄 수 있다”는 평을 얻었다. 재클린 케네디나 다이애나 왕세자비 역시 맵시 있는 의상 연출법으로 정권이나 왕가의 인기를 국내외적으로 높였다.
퍼스트레이디의 패션에 대해 보수적인 잣대를 들이대온 한국에서도 최근 “멋있는 퍼스트레이디를 갖고 싶다”는 의견이 조금씩 나오고 있다. 이미 선거 운동 과정에서 노출된 ‘예비 퍼스트레이디’들의 패션이 관심의 대상이다.
미국의 뉴스전문채널 CNN은 지난해 1월 워싱턴의 스미소니언박물관에서 역대 미국 퍼스트레이디들의 드레스 전시회가 열리는 동안 ‘퍼스트레이디들의 패션 감각이 면밀히 조사받고 있다’는 제하의 기사를 통해 날로 까다로워지는 유권자들의 바람을 이렇게 요약했다.
“국민은 그들이 패셔너블해지기를 원한다. 하지만 지나치게 패셔너블한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 그들로서는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을 것이다.”
동아일보 위크엔드팀과 패션정보회사 퍼스트뷰코리아(www.firstviewkorea.com)는 △동아일보 화상 데이터베이스 △각 대통령 후보의 공식 사이트 △방송 출연 프로그램 및 신문 잡지 기사 △각종 인터넷 포털 사이트 △각 정당에서 제공한 홍보용 자료 등에 게재된 사진 또는 동영상을 참조해 18∼23일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부인 한인옥씨,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부인 권양숙씨의 패션 감각을 분석했다.
●한인옥-따뜻한 중간색상의 카디건
이 후보의 부인 한인옥씨가 언론에 노출될 때면 마치 공식처럼 맞춰 입는 옷은 △둥근 칼라의 블라우스 △파스텔 색상의 카디건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길이의 스커트다. 특히 홍보용으로 배포되는 사진 자료나 여성 잡지에 등장하는 연출 사진에는 어김없이 파스텔 색상의 카디건과 단아한 이미지의 A라인 스커트가 등장한다. 가장 즐겨 입는 색은 분홍색과 연보라색. 60대 특유의 자애로운 이미지를 연출하는 데 효과적인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옥색, 아이보리 등 밝은 색상의 한복을 보다 즐겨 입고 있다.
양장은 선이 가늘고 여성스러운 디자인을 즐긴다. 이 같은 디자인은 중년 여성들을 위한 국내 브랜드 중 일명 ‘마담 부티크’로 불리는 ‘셀리나 윤’ ‘김연주’ 등의 스타일. 이들 의상은 우선 칼라 깃이 작고 둥그렇다. 또 깃이 크거나 각이 져 있더라도 옆으로 낮게 퍼져 전체적으로 무난하고 차분한 느낌을 주는 디자인이다.
정장의 색상 또한 △아이보리색(8월 8일 국회의원 재선거 투표 때) △연보라색(지난해 5월 8일 노인정 방문 때) △복숭아색(지난해 4월 29일 보육원생 초대 국회의사당 행사 때) 등 따뜻한 색 계열의 파스텔톤이 많았다. 스트라이프나 체크 등 눈에 띄는 무늬는 꺼린다. 퍼스트뷰코리아 이정민 이사는 “한씨가 좋아하는 파스텔톤의 명도나 채도는 40대 이상 주부들이 좋아하는 명품브랜드인 ‘에스카다’풍”이라고 분석했다. 디자인이나 색감으로 미루어 볼 때 대개 니트와 스커트류는 기성품을 구입하고 정장류는 맞춰 입는 것으로 보인다. 운동회 등 야외 봉사 활동을 제외하고는 양장 차림에서 치마 정장을 입는 비율이 80% 이상을 차지했다.
이 같은 디자인과 색상은 전반적으로 ‘커리어 우먼형’보다는 ‘전업주부형’ 여성이 즐겨 찾는 스타일. 한씨 비서진은 “한 여사가 이회창 후보의 셔츠나 남방을 구입하기 위해 찾는 제일평화시장이나 광장시장에서 옷감을 사서 직접 만들어 입기도 하고 맞춰 입기도 한다”고 말했다.
한국인의 얼굴과 문화의 상관관계를 연구해온 서울교육대 조용진 교수(미술교육과)는 한씨의 얼굴형에 대해 “고대 가야국의 지배층이었던 알타이계(북방계)의 전형적인 형태로 이 타입의 사람들은 피부가 얇고 뼈가 가늘어 섬세한 인상을 주며 우뇌가 발달해 감성적이고 즉흥적인 성격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 때문인지 짙은 색상의 슈트나 강한 패턴은 잘 어울리지 않는 편. 퍼스트뷰코리아는 “지난달 말 한 언론사 행사에 참가할 때 입었던 보라색 슈트와 같은색 스트라이프 블라우스는 어둡고 칙칙해 한씨의 이미지에 가장 잘 안 어울리는 아이템이었다”고 분석했다.
97년 선거를 전후해서는 작은 진주 목걸이와 귀고리 세트를 착용하거나 붉은색 계열의 스카프도 두르곤 했던 한씨는 이번 선거운동 기간에는 액세서리 착용을 절제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씨의 한 경기여고 동창생은 “예전에는 중년 여성들이 즐겨 찾는 중고가(中高價)의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와 동대문시장, 제일평화시장 등을 고루 찾았지만 이 후보가 정계에 진출한 이후 재래 시장 쪽을 보다 즐겨 찾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권양숙-가는 줄무늬 슈트
23일 오전 서울 중구 정동 구세군 사회부에서 만난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부인 권양숙씨는 미니멀한 디자인의 무릎 길이 고동색 원피스에 같은 색상의 재킷을 입고 있었다. 둥근 모양의 틀 가운데 진주알이 대롱대롱 달려있는 브로치가 눈에 띄었다. 권씨는 “대선 캠페인이 본격화된 이후 직접 구입한 것”이라고 말했다.
구두는 리본형 매듭이 있는 평범한 디자인의 검은색이었다. 권씨의 비서는 “권 여사가 패션에서 가장 신경을 쓰는 부분이 의상과 신발의 색상을 맞추는 것이어서 고동색 색상과 어울리지 않을까봐 걱정했다”고 말했다.
감색 밤색 등 다소 어두운 색의 스커트를 즐기는 권씨는 어깨와 깃의 각이 잘 살아나는 남성적인 디자인의 의상을 좋아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파스텔톤을 택하더라도 밝은색보다는 회색과 검은색이 섞여 명도가 낮아진 색을 좋아한다.
서울교대 조용진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권씨는 피부가 다소 검고 콧망울이 뚜렷한 남방계형. 남방계형은 이성적이고 계산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후천적 취향을 배제하자면 이 같은 성격의 여성은 채도가 높고 밝은 색보다 어두운 색상을 좋아할 가능성이 높다. 원피스를 입어도 남성적인 느낌이 나는 이유는 체구에 비해 조금 넓은 어깨와 허리를 곧게 펴고 서는 유난히 바른 자세 때문. 대부분의 여성들은 보통 양 어깨를 안쪽으로 모으고 서서 남성에 비해 다소 구부정한 인상을 준다.
정장을 입을 때 가늘고 섬세한 줄무늬가 있는 것을 택하는 것도 도회적이고 강인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 일조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가는 줄무늬는 남성적인 느낌을, 굵고 화려한 줄무늬는 여성적인 느낌을 준다.
퍼스트뷰코리아는 최근 KBS 1TV의 ‘아침마당’에 출연할 때 입었던 가는 줄무늬가 있는 감색 정장을 권씨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아이템으로 꼽았다. 반면 8월 18일 서울 종로구 명륜동 자택을 기자들에게 개방할 때 입었던 감색의 얇은 원피스는 가슴 부분에 수직으로 프릴이 달려 있고 체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얇은 소재라서 남성적인 이미지의 권씨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는 아이템으로 꼽혔다.
권씨는 평상복으로 동물무늬가 있거나 가슴 위쪽에 큐빅이 박힌 스타일도 즐긴다. 중년 여성을 타깃으로 한 국내 캐주얼 브랜드 중 ‘뻬띠앙트’ ‘이동수 가나스포르티바’풍. 활동적인 성격의 여성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권씨의 포인트 액세서리는 브로치. 공식적인 행사 때 즐겨 착용하는 은색의 나비 모양 브로치처럼 크기가 크지만 사치스러운 느낌을 주지 않는 단순한 디자인을 선호한다. 한복을 입는 일이 많지 않아 다리와 발 부분이 자주 드러난다. 즐겨 신는 신발 브랜드는 엘레강스 엘칸토 에스콰이어 등 국내 브랜드의 것으로 보인다.
화장품은 20∼30대 초반 여성들 사이에 인기 있는 브랜드의 것도 좋아하는 편. 한 여성지에 공개된 프라다 스타일의 화장품 파우치 안에는 중년 여성들이 좋아하는 설화수 크림, 샤넬 립스틱 외에 20대들이 좋아하는 슈에무라와 바비브라운 제품이 들어있어 눈길을 끌었다.
김현진기자 brigh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