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TV 뉴스에서 한국 만화산업의 침체 원인을 진단하는 코너를 보았다.
만화가 권가야씨는 인터뷰에서 “만화가보다 만화를 잘 알고 이해하는 편집자를 육성하는 것이 만화산업을 활성화시키는 빠른 길”이라고 말했다. 만화가 육성이 아닌 편집자 육성이라는 말이 이색적으로 들리지만 일본 만화업계의 편집자를 만나서 이야기해 보면 매우 타당하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일본의 만화 편집자는 기획단계에서부터 참여해 만화가와 함께 설정을 정하고 캐릭터를 만들고 스토리의 진행에 조언을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만화가로 성공하려면 편집자를 잘 만나는 것이 첫 번째 관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본에는 ‘1억부 작가’로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단행본 만화를 1억부 이상 판매한 초대형 만화가들이다. 그 중 한 사람인 ‘다카하시 루미코(란마 1/2의 작가)’와 10년 정도 콤비로 작업을 같이한 편집자를 만난 적이 있다. 1억부 작가의 파트너답게 엔터테인먼트 콘텐츠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편집자의 철칙 중에 ‘주인공은 반대, 라이벌은 그대로’라는 것이 있다. 주인공은 겉모습과 실제 행동이 반대가 되도록, 라이벌은 겉모습과 행동이 일치되도록 캐릭터를 설정해야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이런 철칙은 국내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요즘 장안의 화제를 모으고 있는 TV 드라마 ‘야인시대’를 떠올리면 된다. 주인공인 김두한 역을 맡고 있는 안재모씨는 전혀 싸움을 잘할 것처럼 보이지 않는 외모다. 라이벌인 구마적 역을 담당한 이원종씨는 겉보기에도 강해 보인다.
뿐만 아니다. 10여년 전 빅히트를 기록한 영화 ‘장군의 아들’에서 김두한 역을 맡았던 박상민씨나, 영화 제작이 진행되고 있는 ‘바람의 파이터’의 주인공인 최배달 역을 맡게 된 가수 ‘비’는 모두 싸움을 잘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스타일이다.
약해 보이는 주인공이 강해 보이는 상대방을 이기니까 재미를 주는 콘텐츠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강해 보이는 사람이 약한 사람을 이기는 경우가 많지만, 이런 사실적인 설정은 비장한 메시지를 주는 스토리에 어울릴 것 같다.
나약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강하고, 강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정하고, 멍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샤프하고. 이런 식으로 주인공을 설정해야 캐릭터의 매력이 살아나고 주인공의 행동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라이벌까지 외모와 반대되는 행동을 하면 콘텐츠 수용자들이 헷갈려 하기 때문에 이야기에 대한 몰입도가 떨어지고, 주인공에게서 느끼는 카타르시스가 반감된다. 라이벌은 생긴 그대로 행동하는 것이 좋다.
1억부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판매부수를 만든 사람이 한 말이므로 스토리와 관련 있는 콘텐츠를 개발하는 사람은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을 것 같다.
김지룡 문화평론가 dragonkj@cho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