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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김기홍/"국민을 감동시켜 주세요"

입력 | 2002-11-28 19:02:00


“교수님, 그러면 후보단일화 협상에서는 누가 이긴 겁니까?” 지난주 금요일 저녁, 협상론에 대한 강의가 거의 끝나갈 무렵 한 학생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이날 아침에야 후보단일화를 위한 민주당과 국민통합21 간의 협상이 겨우 타결되었고, 강의가 진행되고 있던 시간에 노무현, 정몽준 두 후보의 텔레비전 토론이 열리고 있었으니 궁금할 만도 했다. 글쎄, 누가 이긴 것일까.

▼'선택의 역설' 보여준 단일화▼

협상의 측면에서만 본다면 정 후보측의 상황인식과 협상전략은 탁월했고, 그것은 정 후보측의 협상 우위로 연결되었다. 사실 노 후보가 국민경선 방식 대신 여론조사 방식을 수용할 때부터 정 후보측은 칼자루를 쥐고 있었던 셈이다. 또 노 후보가 자기에게 불리할 수 있는 여론조사 방식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단일화에 대한 의지가 정 후보보다 더 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상황에서 정 후보는 조금 더 밀어붙여도 된다는 판단을 했음이 분명하다. 이런 판단은 이 협상에 11월27일(후보등록일)이라는 시한이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게임이론에 따르면 시한 직전에 마지막 제안을 하는 자가 협상의 모든 과실을 가져가기 때문이다. 시한이 지나면 만사휴의(萬事休矣)로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인식 하에 정 후보측은 여론조사 방법의 누출을 이유로 재협상을 요구했다. “재협상이라니?” 노 후보측의 반응이었다. 하지만 정 후보측은 오히려 자신들의 요구사항(여론조사 기간과 시기 변경)을 업그레이드하여 ‘역선택’ 방지를 위한 안전장치(설문 조항의 변경과 여론조사 무효화 방안)까지 요구했다. 정말, 시한을 배경으로 한 탁월한 협상전략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전략은 다소 무리하게 보일 수도 있었지만, 노 후보의 단일화 의지를 전제로 할 때 정 후보측으로서는 해볼 만한 베팅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협상’에서의 성공이었다.

그러나 협상에서의 성공이 왜 단일후보 자리 차지하기로 이어지지 못했을까. 정 후보측은 당시의 지지도를 볼 때 ‘협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곧 단일후보로 결정되는 것이라는 착각 아닌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어떤가. 단일화 방법을 찾는 협상 과정에서는 이겼지만,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는 또 하나의 과정(여론조사)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사후적(事後的)으로 볼 때, 협상의 과정에서 그들이 승리할 수 있었던 상황인식(노 후보가 더 단일화를 원한다)과 전략적 방법(시한을 배경으로 밀어붙이는 방법)이 바로 그들을 최종적인 승자가 되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역설(逆說)이 아닐 수 없다. 한 쪽은 밀어붙이고 한 쪽은 그대로 수용하고. 그러니 상대적으로 “신뢰를 깨뜨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한 노 후보가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사후적으로 본 이러한 평가가 맞는다면, 노 후보는 단일화 협상에서는 지고 단일후보를 결정하는 본 게임에서는 승리한 셈이 된다. 무엇이 그런 승리를 가능하게 한 것일까. 노 후보가 협상과정에서 한결같이 보여준 것은 단일화에 대한 의지다. 그러니 그것이 국민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신이 우리나라를 사랑하는가 봅니다”라는 다소 과장된 네티즌의 반응은 그 일관된 태도에 대한 찬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정 후보가 깨끗이 승복함으로써 이런 찬사가 이제는 노 후보에게만 쏠리지는 않는다. 승패야 어찌되었든 게임의 규칙을 만들고 거기에 승복한다는 것은 이 ‘멍청한’ 정치판에 보통 희망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은 멋있는 남자”라는, 정 후보에 대한 소감이 입에 발린 말로 여겨지지 않는다.

▼깨끗한 승복에 모두 승자▼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은 대통령선거에 대한 관심이 보통이 아니다. 하지만 ‘넋 빠진’ 경제 때문에 얼이 빠진 가장들에게는 이런 관심마저 사치일 수 있다. ‘나라다운 나라’이건 ‘새로운 나라’이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들도 안다. 공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국민의 가슴을 어루만지는 정치가 제일이라는 것을. 그러니 누군가 개구쟁이 타이르듯 한 말이 가슴을 떠나지 않는다. “경제 4강이 아니라도 좋다. 국민을 감동만 시켜다오.”

김기홍 산업연구원 연구원·객원논설위원 gkim@kiet.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