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 UIP코리아
그 때 그 일만 없었더라면 인생이 달라졌을까. 불청객처럼 찾아온 우연이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필연이 되어버리고 마는 일이 어디 영화 속에서만 있나. ‘체인징 레인스’는 전혀 다른 길을 걷는 두 사람이 우연한 접촉사고로 마주치고, 이 사소한 우연이 악연으로 발전해 삶을 뒤흔드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두 남자가 있다. 도일 (새뮤얼 잭슨)은 이혼당한 뒤 알콜중독에서 겨우 빠져나와 아이들 양육권만은 빼앗기지 않으려 애를 쓰는 가난한 중년 남자다. 반면 게빈 (벤 에플렉)은 젊은 나이에 대형 법률사무소의 파트너가 되어 남부러울 게 없어 보이는 변호사.
서로 다른 이유로 두 사람 모두 급하게 법원에 달려가던 어느 날, 게빈의 급작스런 차선 변경으로 접촉 사고가 나고 이 작은 사고는 둘의 인생을 바꿔놓는다. 사고 때문에 도일은 법정에 20분 지각해 양육권 소송에서 지고 만다.
반면 게빈은 대충 사고수습을 한 뒤 급하게 가면서 재판의 증거 서류를 떨어뜨린다. 죽은 백만장자가 재단에 대한 결정권을 게빈이 소속된 법률사무소에 넘긴다는 내용의 이 위임장을 되찾지 못하면 그가 그동안 출세를 위해 애써온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만다.
이 영화에서 긴장을 자아내는 대립 구도는 선,악의 이분법이 아니라 점점 꼬여가는 상황 그 자체에 있다. 도일이 주운 게빈의 서류를 돌려주려고 하던 순간 악에 받친 게빈이 남긴 전화 협박 메시지를 듣고 폭력적으로 돌변하듯, 상황은 계속 엇나간다. 두 사람은 점점 나빠져가는 스스로를 자책하면서도 얄궂은 타이밍의 엇박자에 굴복해 분노의 포로가 되어 보복의 강도를 높여간다.
이 영화는 선의, 양심, 도덕이라는 포장을 한 꺼풀 벗겨내면 세상의 속내는 다 속고 속이는 추악한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서류를 잃어버린 게빈에게 위조를 지시하는 상사들은 “나는 세상에 해보다는 득을 더 많이 주고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것 말고 인생을 평가하는 다른 기준이 있냐”고 태연자약하게 반문한다. 죽은 백만장자 역시 악덕 변호사에게 속은 가여운 노인이 아니라, 말레이시아 공장에서 노동자를 착취해 돈을 벌었으며 세금 감면을 노리고 재단을 설립한 것일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양심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게빈이 마지막에 되찾은 서류를 내던지며 내뱉은 말처럼 “경계선 위에서 살아가듯” 위태위태한 것이다.
‘노팅 힐’(1999년)로 세상에 이름을 알린 영국 로저 미첼 감독의 할리우드 데뷔작. 연출도 세련됐지만, 챕 테일러와 마이클 톨킨이 함께 쓴 시나리오의 탄탄함이 더 돋보인다. 벤 에플렉과 새뮤얼 잭슨 두 배우의 연기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원제 ‘Changing Lanes.’ 15세이상 관람가. 29일 개봉.
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