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시아 해안 근처에 있는 Krka강 폭포수 아래서 목욕을 즐기는 사람들
“Dodi” 이 변덕스럽게 느껴지는 이름이 우리가 탄 돛단배의 이름이다. 우리 일행 네 명은 한때 유고슬라비아라고 불리던 나라의 해안선을 누비고 있다.
이 아드리아해의 크리스탈처럼 맑고 투명한 물에서 라벤더, 세이지, 로즈마리 그리고 타임향이 났다. 마치 천국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어디선가 미풍을 타고 갈매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달마시아의 이 섬들이 1990년대의 마지막 발칸 전쟁으로 수 천년간 피로 얼룩져 있었다는 것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할 듯 하다. 한 때는 철의 장막으로 유명했던 동서의 교차로였던 이 바다는 보스니아에 폭탄을 투하하기 위해 이용됐다
유고슬라비아 출신인 우리 일행은 어린시절을 보낸 이 곳의 경치, 소리 그리고 냄새를 회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돛단배들이 달마시아 해안가에 있는 Primosten 마을
부두에 닻을 내리고 있는 모습
드디어 항해의 시작. 이탈리아계의 선원 Patrizia Stekar는 43피트(12.9미터)짜리 프랑스산 돛단배를 임대했다. 이 배에는 맨해튼의 미식가를 위해 마련한 듯한 재료들이 가득했다. 올리브 스프레드, 말린 후추열매, 부푼 패스츄리 반죽은 물론 12종류의 파스타와 에스프레소 커피 등등…
우리는 어부의 아내가 만든 치즈를 한덩이 산 후 Pag섬에서 빠져나왔다. Pag는 현재 크로아티아의 일부분이다. 크로아티아는 세르비아인들과의 전쟁에 의해 1991년에 유고슬라비아 공화국에서 바뀐 이름이다.
일행 가운데 맨해튼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리디아는 하루 두번씩 우리에게 너무나도 훌륭한 요리를 제공했다. 어린 오징어로 만든 리소또 뿐만 아니라 올리브 오일과 오렌지 즙을 곁들인 생새우요리까지도 맛볼 수 있었다.
이런 요리들은 그녀의 레스토랑 'felidia'에서 만들던 몇가지와 그녀가 출연하는 PBS 공영방송국 요리코너에 소개된 것들이지만 대부분 그녀가 아드리아해 북단의 반도 이스트리아에서 처음 맛본대로 즉흥적으로 요리한 것이었다.
밤이 되면 망망대해에서의 강풍을 피하기 위해 어느 작은 만에 닻을 내리거나 어촌부두에 배를 대고 어촌 시내로 나가보기도 했다.
지역민들은 우리의 이러한 행동을 'Passeggiata'(파쎄짜하타라고 발음한다)라고 불렀는데 이는 '바닷가의 저녁산책'이라는 뜻의 이탈리아 원어로 그들에게서 아직도 이탈리아문화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이 때 달마시아인들은 몸을 완전히 감싼 드레스를 입는데 이것은 젊은 남녀가 미래의 신부, 신랑을 섬기는 의식의 일종이다.
Vis섬에서 우리는 신선한 과일과 야채와 같은 기본적인 것들을 사고 라벤더 아로마 오일과 같은 조금 특별한 기념품들도 샀다. 그 섬을 지배 했던 이탈리아 베니스의 방언에 영향을 받은 크로아시안 언어를 사용하는 Vis 원주민들과 대화하는 것은 정말로 이국적이었다.
우리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순수언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우리들 중 세 명은 뉴욕에 살고 한명은 이탈리아에 살고 있다. Vis 원주민은 우리가 단지 한문장을 말할 때에도 세가지 언어를 한꺼번에 사용하며 횡설수설하는 것을 기가막히다는 듯 듣곤 했다.
우리는 코로아티아어와 슬로바키아어-전 유고슬라비아의 두 언어- 그리고 이탈리어와 영어, 게다가 이탈리아와 이스트리아의 방언까지 수시로 언어를 바꾸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우리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축복 받은 땅과 같은 지중해의 반대편 끝에서 '풍족함의 축복'을 누렸다.
달마시아의 어부들이 해산물들 가득 담긴
그물을 끌어올리고 있다.
달마시안섬은 양의 우유, 꿀, 아몬드, 포도, 밀, 올리브, 대추와 석류가 그득했고 땅에서는 여러종류의 풀과 약초들이 뿜어내는 향내가 났다. 통나무로 된 온실위에 우리는 월계관과 무화과를 걸었다. 배에 올라타면서 우리는 조그만 화분에 나륵풀을 심었다.
단순하지만 정갈한 음식과는 달리 우리의 숙소는 매우 거칠었다. 침대와 문까지의 걸을 수 있는 공간이 9평방 피트(0.8평방 미터)밖에 안되는 좁은 통나무집에서 나는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머리가 나무로 된 천장에 닿지나 않나 주의해야만 했다.
위험할만큼 강하게 부는 바닷바람은 우리를 3일 동안 Vis섬에 가두어 놓았다. 덕분에 우리는 이 섬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었다.
6년 전까지만해도 이 섬에 관광객들의 출입이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섬은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Via는 수 십년 동안 전략적 방어기지 역할을 해왔다. 이 섬에도 산 페드로, 캘리포니아와 알라스카에서 이민온 어부들이 있었다.
섬의 안내를 맡즌 관광가이드 Zoran Franicevic씨는 섬을 구경하는 내내 "하나님이 창조한 것을 망가뜨리지 말라"는 그의 관광 철학을 강하게 피력했다.
Vis에 대한 암벽등반, 승마 등 다양한 관광상품을 제공하는 에이전시 Alternatura는 바다동굴부터 고대 로마의 목욕탕과 그리스 원형경기장까지 원하는 모든 것을 구경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마련해 놓았다.
이 역사적 요새에 있는 돌들은 한때 중국산 럼, 쿠바산 시가 등을 교역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였고 후에는 영국군이 나폴레옹과 싸울 때 영국군이 사용한 적도 있다. 나폴레옹은 1805년에 Vis를 침략했었다.
시끄러운 매미소리를 뒤로 하고 걷다보면 '누드 비치가 바로 요 앞'이라고 쓰여진 표지판을 볼 수 있다.
석양이 지는 어느날 밤, 우리는 섬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올랐다. 그 곳은 무너져 내린 작은 로마 카톨릭 성지가 로즈마리와 세이지 덤불에 뒤덮여 있었다.
그 성스러운 성지안에서, 일행인 조란은 크로시아 리제카에서 태어나 퀸즈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의 친구 완다와의 우정을 축하하기 위해 그녀에게 '영혼의 공주'라는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우리가 꽃으로 뒤덮여 있는 초라한 재단앞에서 함께 기도하려고 하자 조란은 완다에게 하얗고 커다란 초를 켜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우리는 절벽에 있는 소나무와 로뎀나무 사이에 무엇인가를 새겨놓기 위해 수백개의 이끼 낀 돌계단을 올랐다.
이 곳은 제 2차 세계대전동안 나찌와 파시스트들에 대항해서 싸운 공산당원의 리더였던 Marshal Tito가 명령을 내리곤 했던 곳이라고 한다. 오래 전에 Vis에 살던 사람들이 이집트와 시내사막의 엘 싸트 망명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