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가 시기인 만큼 앉은자리에서 정치 얘기가 나오게 마련이다. 우리 또래의 동료나 친구들은 정치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을 하도 많이 겪어서 흥분하는 법이 없다. 대체로 냉소적인 논평을 가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런 까닭에서인지 요즘 가장 많이 화제에 오르는 것은 이른바 ‘철새 정치인’이다. 자기 생각이라기보다도 신문 칼럼에서 본 것을 소개하는 논평의 내용은 아주 다양하다.
▼정치인 개개인도 문제지만…▼
이익을 노려 쉽게 정당을 바꾸는 정치인을 목숨 걸고 긴 여행길에 오르는 철새에 비유한다는 것은 동물의 삶에 대한 모독이라고 했다는 동물학자의 말에 모두 공감했다. ‘정치투기꾼’이란 말이 어울린다거나, ‘진드기 정치인’이라고 부르자는 제의가 그럴듯하다는 얘기도 나왔다. 한국에는 모두 266종의 철새가 방문한다는 것, 텃새를 포함해 모두 372종의 새가 있다는 전문적 지식의 전달도 있었다.
철새가 혼자 먹이를 챙기겠다고 무리에서 이탈하는 경우는 없다고 한다. 기력이 쇠하거나 다쳐서 낙오할 때는 동료가 남아서 기다려준다는 얘기도 있다. 시베리아에서 날아와 우리나라 갯벌에서 체력을 보강한 뒤 한 번도 쉬지 않고 호주까지 날아가는 특정 철새에 대해선 놀라움과 경의를 표했다. 모두 정치인보다는 철새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문득 20세기 미국의 대표적 시인인 월리스 스티븐스의 ‘지빠귀를 보는 13가지 방식’이란 시편이 연상되면서 개인적인 감회를 금할 수 없었다.
우리 또래가 철새를 알게 된 것은 ‘후조(候鳥)’란 말을 통해서였다. 제비 기러기 뻐꾸기 두견이 뜸부기 왜가리 등이 모두 후조라고 배웠다. 학교에서 배웠을 뿐 아니라 우리네 어린 시절은 이런 철새를 빼버린다면 아주 황량해지고 말았다. 11월 ‘강남’을 향해 우리 땅을 떠날 무렵이면 전선줄마다 제비가 새까맣게 모여 앉아 지절대며 요란한 잔치를 벌이는 것은 장관이었다. 늦가을 푸른 하늘을 가르며 나는 기러기 떼는 산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우리를 마당 한가운데 세워 놓았다. 전쟁 이후 거의 흔적 없이 사라져버린 정경들이다.
기러기나 뻐꾸기는 동요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철새는 동양의 시에서 소재이자 장치가 되어 왔다. “높이 북으로 날아가는 기러기에 창자가 끊어질 듯하다”는 두보(杜甫)의 ‘귀안(歸雁)’에서 “산 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는다”는 정지용의 ‘고향’에 이르기까지 그 사례는 허다하다.
이렇듯 동양의 시 전통과 우리네 보편적 정서에서 철새는 계절의 순환을 알리며 자연의 넉넉한 운행을 시사하는 날짐승이었다. 또 순리라는 인생론적 감회를 안겨주는 어김없는 전령(傳令)이었다. 매임 없는 자유의 이미지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날개였다.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의 하나가 정치적 비행과 연루됨으로써 오염되고 훼손되었음을 필자 역시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철새 정치인’은 애초부터 잘못된 짝짓기요, 잘못된 명명이었다.
그러나 ‘철새 정치인’에 대한 과도한 성토는 본의 아니게 보다 중요한 국면을 은폐하고 외면하는 결과를 빚을 수 있다. 1987년 선거 이후 유권자들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 자주 놓이게 되었다. 87년 선거 직후 외국에 체류했던 필자는 왜 정책적 차이가 없는 야당이 통합후보를 내지 않았느냐는 외국인의 질문에 뭐라고 답변할 길이 없었던 경험이 있다. 90년에 벌어진 3당 짝짓기도 우리를 헷갈리게 하는 일이었다. 97년 대선 때 정책적 합일점이 없는 DJP 정략결혼은 결국 ‘가정파괴’와 정치적 추문으로 끝났다. 남은 것은 심화된 냉소주의의 확산뿐이다.
▼'철새의 몸통'은 낡은 정치틀▼
국민이 3김정치 청산을 바라는 것은 87, 90, 97년의 정치적 추문의 재탕 삼탕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목적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적 윤리적 비행에 넌더리가 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낡은 정치를 청산하고 새 정치를 펴겠다면서 실제로는 타기할 만한 정략결혼적 짝짓기를 서슴지 않는 오늘날 정치권의 작태이다. 우리는 신악이 구악을 뺨치는 것을 보았다. 문제는 철새의 깃털이 아니라 몸통이다.
요란한 빈 수레 소리에 귀가 먹먹해지는 어제 오늘, 뻐꾸기 소리라도 듣고 싶다.
유종호 연세대 특임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