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으로 미국 뉴욕시 브루클린 지방검찰청 최연소 부장검사 자리에 오른 정범진(미국명 알렉스 정·35·사진) 검사가 모국을 찾았다. 장애인 재활을 위한 기금모집을 위해서다.
정씨는 조지 워싱턴 법대에 재학 중이던 91년 여름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장애인이 됐다. 양팔을 조금만 움직일 수 있을 뿐 어깨 아래로는 전혀 움직일 수 없다.
4일 오후 호텔로 찾아갔을 때 정씨는 휠체어에 앉아 오른손을 힘겹게 들어올려 악수를 청했다. 정씨는 우리말 중 한자어는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한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했다.
“사고가 난 날은 법대 2학년 여름방학 첫날이었어요. 기분 좋게 시작한 하루였는데….”
6개월간의 병원 생활과 또 다른 6개월간의 재활 치료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아이스하키와 골프를 즐기는 만능 스포츠맨이었던 정씨에게 휠체어 생활은 견디기 어려웠다.
“재활 치료 후에는 정말 아무도 만나기가 싫었어요. 하지만 법대 3학년으로 돌아가기 전인 92년 여름에 참가했던 재활 캠프가 모든 걸 바꿨습니다.”
장애인들이 모여 재활 훈련을 받는 캠프에서 자신보다 불편한 장애인들이 열심히 훈련에 참가하는 모습은 정씨의 정신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나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을 갖기 시작한 것.
재활 프로그램에서 힘을 얻은 정씨는 학교와 가까운 곳에 집을 얻어 자신과의 싸움에 나섰고, 끝내 법대를 졸업했다. 93년에는 뉴욕시 브루클린 지방검찰청 검사로 당당히 임용됐다.
정씨는 검사가 된 뒤 재판에서 24연승이라는 기록을 남기며 부장검사로 승진했다. 지금은 휘하에 80여명의 검사를 거느리고 있다.
“저는 미국에 살고 있는 미국의 검사입니다. 하지만 한국인이란 사실을 잊은 적은 없었어요. 저같이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위해 한국에 장애인 재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꿈입니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나눠주고 싶어요.”
여자친구가 사고 후 곁을 떠났다는 말에 마음이 아프지 않았느냐고 묻자 “이제는 여자친구가 많다”며 웃어 넘기는 그의 자신 있는 모습에선 더 이상 ‘장애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정씨는 26일 렉서스코리아에서 후원하는 장애인 지원 기금마련 경매에 참가한 뒤 가족들과 한국에서 연말연시를 보내고 내년 1월 6일 뉴욕으로 돌아간다.
김선우기자 sublim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