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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그게 이렇지요]정몽준 단일화후 '안개행보' 배경

입력 | 2002-12-04 19:28:00


《“도대체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후보와의 단일화가 결정된 뒤에도 1주일 넘게 이런 저런 조건을 내세우며 공조에 나서지 않고 있는 국민통합21 정몽준(鄭夢準) 대표의 ‘안개행보’가 정치권에 분분한 관측을 낳고 있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불의의 패배’에 대한 억울함에다 장래 입지에 대한 계산이 작용한 것 같다는 분석에서 현대그룹으로부터의 압력설, 한나라당의 공작설 등 루머성 소문까지 무성한 실정이다. 4일 노 후보가 유세와 TV 방송연설을 통해 적극적인 ‘구애(求愛)의 손짓’을 보냈지만 정 대표측은 여전히 “진의를 파악해 봐야겠다”며 신중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회한의 여론조사▼

통합21의 핵심 관계자는 최근 “정 대표가 아침에는 ‘단일화는 우리 정치사의 중요한 기록으로 지켜져야 한다’고 말했다가 오후에는 ‘중요한 문제를 못 챙긴 것은 나의 잘못’이라며 여론조사 얘기를 꺼내곤 한다”고 말했다.

단일화 여론조사에 앞서 설문문항 등을 꼼꼼히 따져보지 않은 데다 설문 후 ‘검증’ 절차도 생략했던 데 대한 후회가 엿보인다는 것이다. 실제 정 대표 주변에서는 여론조사 직전 민주당과 노 후보 지지자들의 결집력 등을 들어 “조사결과가 왜곡될 수 있다”는 지적이 적지 않았으나 당시에는 묵살당했다. 결국 조사결과가 패배로 나타난 뒤에야 정 대표의 측근들은 “프로 집단에 아마추어가 당했다”고 억울해 했다.

한 당직자는 “후보가 안 된다는 생각을 꿈에도 해보지 못한 정 대표가 뜻밖의 여론조사 결과를 현실로 받아들이기에는 고통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커지는 상실감▼

정 대표의 복잡한 심사는 최근 인사에서도 묻어난다. 1일 민주당과의 공동선대위원장에 조남풍(趙南豊) 예비역대장과 최운지(崔雲芝) 전 의원을, 비서실장에 10년이상 자신을 보좌해온 이달희(李達熙) 보좌관을 임명한 반면 1, 2차 후보단일화 협상 주역이었던 이철(李哲) 김민석(金民錫) 전 의원을 선거대책특보로 사실상 2선 후퇴시킨 것이 단적인 예다. 당내에서는 정 대표의 ‘심중’을 잘 아는 인물들을 핵심에 포진시킨 것은 당분간 그의 정치행보가 ‘응축형’이 될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는 최근 당외 인사들과의 접촉도 피하고 있다. 최근 한 민주당 중진의원의 회동 제의를 거절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공조 반대론▼

정 대표의 소극적 행보에는 공조에 반대하는 주변의 의견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 대표측 핵심관계자들 가운데는 단일화 이후 한나라당측으로부터 “정 대표가 이회창(李會昌) 후보를 돕거나 최소한 중립지대에 머물 수 있도록 해달라”는 설득을 받은 인사들이 적지 않다는 후문이다. 통합21의 한 관계자는 “이러저러한 논리를 내세워 정 대표와 현대 가문의 장래를 위해 이념과 노선이 다른 노 후보를 돕지 말라는 한나라당 관계자들의 ‘각개격파’ 작업이 시도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또한 정 대표를 도왔던 지인들 가운데도 “그냥 중립을 지켜줬으면 좋겠다”는 주문이 없지 않다. 일각에서는 현대 가문의 형제기업들로부터 ‘중립 요청’이 있었다는 소문마저 나돌고 있다. 정 대표는 이와 관련, 최근 회의석상에서 “현대나 기업 친구들이 ‘한나라당 도와라’, ‘가만히 있어라’, ‘노 후보를 도와라’는 등 의견이 분분하다는데 현대중공업은 설사 이회창 후보가 집권해도 망하게 할 수 없는 회사다”며 복잡한 심경의 일단을 피력했다.

▼꿈★은…▼

정 대표는 최근 핵심당직자들에게 “무(無)에서 새로 시작하겠다”며 ‘재기 의지’를 다지는 얘기를 했다.

정 대표측 한 관계자도 “92년 대선에서 실패한 정 대표의 선친(정주영·鄭周永 전 현대 명예회장)이 판을 정리한 뒤 현대가 무사했느냐. 오히려 겁먹고 물러서면 더욱 밟히는 게 정글의 생존 법칙이다”고 정 대표의 심경을 대변했다.

이와 관련해 정 대표는 자신이 ‘몽니를 부리는 듯’이 비치는 데 대해 몹시 화를 내고 있다는 게 측근들의 전언이다. 당의 한 핵심관계자는 “정 대표도 이미 ‘대통령 병’에 걸렸다. 5년 뒤를 내다보고 있다. 확고한 입지 마련을 위해서는 자신의 존재를 국민 앞에 분명히 부각시켜야 하고, 이를 위해 필요하다면 입장이 다른 노 후보의 정책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고 말했다.

분권형 대통령제에 이어 대북정책 조율을 내세우고 있는 데 바로 이런 복안이 깔려 있다는 얘기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민주당 노무현 후보는 4일 인천지역 유세에서 “나보고 외교를 모른다고 하는데 내가 왜 모르겠느냐. 이제 정몽준 후보와 손잡았고 정 후보는 세계를 아는, 외교에 대해서도 많은 인맥을 가진 사람으로 둘이서 서로 협력하고 의논해 국정을 끌어가면 외교도, 새로운 정치도 문제가 없다”고 구애 발언을 했다.

노 후보는 이날 저녁 MBC 방송연설에서도 “정 대표와 하나가 됐다. 앞으로 정 대표와 손잡고 국민이 원하는 새 정치를 한번 해보겠다”고 정 대표를 치켜세웠다.

그러나 정 대표측 관계자들은 “노 후보가 전날 TV 합동토론에서 ‘단일화합의는 본래 정치개혁이 대상이었고, 정책조율은 검토중’이라며 정책공조에 소극적 태도를 보였던 점에 비추어 노 후보의 새 발언에 대한 진의 파악이 우선돼야 한다”며 유보적 태도를 보였다.

민주당측은 5일이라도 양자회동을 갖고 공조를 서두르자는 입장이지만 이런 정 대표측 반응에 비추어 성사 여부는 아직도 유동적이다.

박성원기자 sw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