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크루즈가 97년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영화 ‘제리 맥과이어’는 스포츠 에이전트의 세계를 그린 수작이다.
출세가도를 달리던 제리는 어느날 갑작스런 해고통보를 받는다. ‘회사는 돈이 안되는 고객에게도 진실한 관심을 기울여야 하며,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요지의 제안서가 문제가 된 때문이었다.
하루 아침에 실업자가 된 그는 독립을 선언한 뒤 로드라는 삼류 미식축구 선수를 첫 고객으로 만나면서 다시 한번 진정으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
국내에도 스포츠 비즈니스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하면서 에이전트란 낯선 단어가 친숙해진 지 오래다. 과연 에이전트는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것일까.
▽에이전트의 하루
넒은 의미의 에이전트는 소속 선수의 계약과 이적, 광고계약, 출전대회의 섭외는 물론 사생활까지 챙길 뿐만 아니라 선수의 가족과 친구들도 관리한다. 해외에 진출하는 국내 선수의 경우 통역과 말동무에 절세까지 조언해줘야 한다. 한마디로 선수의 손과 발, 그리고 입이라고 생각하면 맞다.
에이전트의 효시는 20세기초 전설적인 홈런왕 베이브 루스가 즐겨 신던 장화를 배달하던 크리스티 월시라는 청년. 당시는 선수의 운동을 돕기 위한 잔심부름을 하는 정도였지만 현재의 에이전트는 선수의 수입에 대한 일정 비율의 수수료를 받는 대신 법과 논리로 중무장한 전문가 집단으로 변모했다. 에이전트가 선수로부터 받는 수수료는 연봉의 경우 4∼8%선이지만 광고계약 때는 30%까지 뛰기도 한다.
▽한국인 에이전트는 누가 있나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2년 전까지 박찬호(텍사스 레인저스)와 손을 잡았던 스티브 김이다. 미국에서 건축 사업가로 일하는 그는 박찬호의 미국 진출부터 시작해 그가 슈퍼스타로 성장하기까지 찰떡 궁합을 과시하며 스타 에이전트로 각광을 받았다.
최근에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인물은 최희섭(시카고 컵스)이 마이너리그에서 ‘눈물 젖은 빵’을 먹던 4년동안 그를 헌신적인 보살핀 이치훈씨.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메이저리그 노조사무국이 인정하는 공식 에이전트인 그는 메이저리거인 훌리오 쥴레타(보스턴 레드삭스)를 비롯, 미국 일본과 남미 선수들도 10명 가까이 거느리고 있다.
축구는 국제축구연맹(FIFA)의 자격증을 획득한 국내 에이전트가 27명이나 된다. 그러나 이중 5∼6명만 에이전트로 공식 활동을 하고 있는 상태다.
▽미국의 슈퍼 에이전트
스포츠전문 주간지 스포팅 뉴스가 연말에 발표하는 ‘스포츠계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명에는 해마다 슈퍼 에이전트의 이름이 6∼7명씩 들어 있다. 이들은 걸음마 단계인 국내와는 달리 천문학적 액수의 계약을 성사시키는 협상의 명수일 뿐 아니라 구단을 좌지우지하는 힘까지 갖고 있다.
야구계의 지존은 박찬호를 비롯, 세계 최고액 선수 알렉스 로드리게스(텍사스 레인저스) 등을 보유하고 있는 스콧 보라스다. 전체적으로는 마이클 조던을 거느렸던 데이브 포크의 영향력이 가장 크다. SFX 스포츠 그룹의 총수인 그는 미국프로농구(NBA)의 슈퍼스타를 대거 확보하고 있다. 삼성 이승엽도 SFX와 손을 잡았다.
제리 맥과이어의 실제 주인공으로 알려진 리 스타인버그와 김병현(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매니 라미레스(보스턴 레드삭스)를 거느린 제프리 무라드도 ‘큰 손’이다.
장환수기자 zangpabo@donga.com
■국내 실태는…
▼프로팀들 인정안해…무자격 ‘중개인’ 난무 선수들만 ‘골병’ 들어▼
국내 에이전트의 수준은 여전히 초보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직 이들은 선수를 대신해 연봉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도 없고 선수의 해외진출 때도 거의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한다.
국내 프로팀의 경우 소속 선수에게 비공식적이나마 에이전트가 있는 것은 어쩔 수가 없지만 이들의 실체는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
연봉 협상에 에이전트를 개입시킬 경우 몸값 폭등과 연봉 갈등이 증폭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에이전트,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에이전트와는 거리가 먼 ‘중개인’들의 자질과 도덕적 해이도 문제다.
94년 박찬호를 시작으로 야구와 축구, 그리고 골프 스타들의 해외진출이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이면서 선수의 장래보다는 일확천금을 노리고 뛰어든 이들도 많았다.
더욱이 자격증조차 없는 이들은 미국이나 유럽 현지의 또다른 에이전트나 중개인을 끌어들여야 했고 이 과정에서 99년 최용수와 김도근 사태가 일어났다. 당시 안양 LG와 전남 드래곤즈소속이던 최용수와 김도근은 ‘입단테스트를 한다’는 에이전트 말만 믿고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웨스트햄 유나이티드로 갔다가 테스트도 받지 못하고 귀국했다.
월드컵 스타로 각광을 받았던 유상철과 황선홍이 일본에서 졸지에 오갈데 없는 신세가 됐던 것도 시장조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무리한 유럽진출을 꾀했던 에이전트의 실수가 가장 큰 원인이다.
장환수기자 zangpab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