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10도에 칼바람까지 불어닥친 11일 새벽 서울 영등포역 앞. 임진국씨(87·서울 영등포구·사진)는 단정한 교통경찰복으로 차려입고 교통정리에 나섰다. 벌써 39년째의 자원봉사다.
임씨는 매일 오전 7시반부터 이곳 삼거리를 시작으로 영등포 일대의 상습 정체 구간을 오후 늦게까지 찾아다니며 교통정리를 하고 있다. 이 지역의 학생 주민 상인들 사이에서는 ‘영등포구 교통부 장관’으로 통한다.
임씨가 이 일에 나선 것은 39년 전인 1963년.
“을지로 4가 청계천 근처에 학교가 있었는데, 학교 앞으로 도로가 있었지. 어느 날 거기를 지나다가 도로를 건너던 초등학생 3명이 U턴하던 차에 받혀 숨진 장면을 본 거야.”
당시 도로에는 신호등이 거의 없었다. 임씨는 그 다음날 반으로 자른 드럼통을 도로 한가운데 갖다 놓고 교통정리를 시작했다.
“새마을 지도자 복장 차림으로 시작했는데 운전자들이 말을 듣지 않아. 당시 남대문에 있던 시경을 찾아가 교통 순경 복장을 얻어냈지.”
임씨는 네 살 때 일본인 부부의 양자가 돼 일본에 건너가 한 미군 부대의 직원으로 근무했다. 1950년 인천상륙작전 때는 미8군 소속으로 북파 전투에 참가했다가 북한군에 잡혀 포로 교환 때 비로소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형과 동생들은 전쟁통에 모두 숨졌고, 여동생 둘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린 뒤였다.
임씨는 가족 없는 외로움을 교통안전 자원봉사로 털어냈다. 서울시장, 영등포 경찰서장, 학부모회 등으로부터 17번이나 감사장을 받았다. 그러나 생활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임씨가 살고 있는 영등포 롯데백화점 옆 허름한 여관의 1평반짜리 쪽방은 교통 신호봉과 바랜 교통 순경복 세 벌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노인수당 32만여원, 동사무소에서 매달 받는 목욕비 1만원, 석 달에 한번 차비로 받는 3만6000원이 수입의 전부. 월세 15만원이 큰 부담이다. 그는 “그나마 매주 한번씩 쌀과 라면, 반찬을 갖다주는 고마운 경찰관이 있다”고 전했다. 임씨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끝까지 거리로 나설 생각이다.
임씨는 39년간 지켜본 교통 상황에 대해 “운전자들이 너무 자기만 생각해. 조금만 양보하면 될 텐데 그게 그렇게 힘이 드는 걸까”라며 씁쓰레했다.
김성규기자 kimsk@donga.com